한국일보

[여성의 창] 이윤선 ㅣ 훔친 수건

2014-05-14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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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서양화가는 해외여행 중 훔친 작은 잔, 접시, 숟가락, 비행기용 구명조끼와 담요 등을 박물관의 유리 진열대를 본 따 ‘뮤지엄 디스플레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세계 유명 박물관이 약탈한 예술품을 당당히 전시하는 뻔뻔함에 대한 풍자의도였다고 한다. ‘훔친 수건’이라 프린트된 수건이 있다. 공중목욕탕의 수건이 자꾸 도둑맞기에 ‘훔친 수건’이라 프린트를 해 넣고 최소한의 수치심에 호소하는 거다. 기념품으로서의 증정 문구와 달리 새로운 세대가 낳은 수건의 이름이다. 매해 모 항공사 기내 담요의 10%가 분실된다고 한다. 조만간 ‘이 담요는 훔치시면 안됩니다’ 혹은 ‘훔친 담요’라고 프린트된 담요가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아파트에선 스쿠터를 탈 수도 없고, 롤러스케이트를 탈 수도 없고, 공놀이도 할 수 없어요. 왠지 알아요? 거기에 가면 이런 사인이 있어요.

No 스쿠터, No 롤러스케이트, No 공놀이. 그러니깐 아무리 하고 싶어도 이런 놀이를 하고 놀면 안 돼요. 거기 사인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요."새로 이사 간 아파트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물을까 말까 잠시 머뭇거렸다. “그럼 넌 그 사인에 ‘No’라고 쓰여 있어 공놀이도 안 하고, 스쿠터도, 롤러스케이트도 안타는 거야? 왜 그런 놀이를 너희 아파트에서 하면 안 되는지 네가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규칙을 잘 지키기 위해서 그런 놀이를 하면 안 되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뭘까?”사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유도 모르는 채, 길들여져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하라고 해서 혹은 하지 말라고 해서 하거나 하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더욱이 요즘처럼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시대, 이 땅에서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운 판국에는 차라리 이 아이의 아파트처럼 사방 곳곳 사는 곳곳, ‘No’라는 사인이 서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세대에게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기성세대는 그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는 것과 같다. 훔친 미래, 훔친 도덕성, 훔친 인성, 이 시대 어른들은 그것들을 침묵이라는 진열대에 담아 또 하나의 ‘뮤지엄 디스플레이’를 열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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