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신희정 ㅣ 도장

2014-04-23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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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내게 처음으로 나 자신을 한 인격체로 느끼게 만들어준 때가 언제였나 생각해보면 아마도 초등학교 6학년 때가 아닐까 싶다. 인격체라고 하니 괜히 거창한 것 같지만, 아버지는 내가 6학년이 되는 해에 한글로 된 도장을 파 주셨고, 그 도장은 내가 괜히 어른이 된 느낌을 들게 만들어 준 도구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어린 마음에 아빠에게 선물 받은 빨간 뿔도장은 너무 뿌듯한 마음을 같게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이니 딱히 특별하게 사용할 곳도 없었던 내 도장은 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되었는지 별 생각과 상상을 하게 만들었었다. 만약 우리 집에 불이 난다면 무엇을 들고 집을 나가야 하나? 난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내 뿔도장과 아버지의 바지를 꼭 들고 나가야겠다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내 도장은 내 재산이었고 아버지 바지에는 현금이 있을 테니 아마도 그 두개가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부질없이 염려했던 가상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초등학생다운 염려를 했던 것 같다. 정말로 초등학생인 내게 도장은 그 용도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선 내 도장이 그 진가를 발휘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긴 겨울방학 중간에 새 교과서를 미리 받았었다. 그 새 교과서를 무겁게 받아오면 아버지는 내 도장을 교과서에 찍으라고 하셨다. 원래부터 교과서를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는 내 도장을 교과서에 찍어 내가 그 책에 주인임을 표시하라고 하셨다. 첫 번째 페이지에 하나 찍고, 백 번째 페이지에 또 하나,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름과 함께 도장을 찍었었다. 그 후 매일 교과서 이곳저곳에 찍혀있는 내 도장을 보면서 수업을 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하다. 아마도 성인이 된 후 한문으로 된 도장을 가졌던 것 같은데, 내 머리 속에는 어린 시절 빨간 도장만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렇게 소중했던 도장, 이젠 사용할 용도도 없고 또 어디에도 그 자취를 찾을 순 없지만 그 추억은 아직도 나와 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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