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필 산책] 주평 ㅣ 가을을 따라간 부겐빌리아

2014-01-01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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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창문을 닫지 마!” 라고 소리치며 꿈에서 깨어 났다. 내 꿈의 태반이 연극하는 꿈이지만, 오늘 꿈은 연극꿈이 아니다. 나는 커텐을 열고, 은행나무 거리로 불리우는 내 집 앞 거리를 내다 본다. 희뿌옇게 새벽이 열리고 있다. 많은 그루의 은행나무 중에 등치가 제일 큰 우리집 앞 은행나무! 지난 가을만 해도 수많은 은행잎으로 기워진 화사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서 있던 나무가, 이제는 그 은행잎을 모두 떨구어버리고는 동화 속의 ‘벌거벗은 임금’ 처럼 홀랑 벗은 나목(裸木)의 여왕이 되어 초겨울 바람에 오돌오돌 떨고 서 있다.

나는 옷을 주섬 주섬 주워 입고 글쓰는 방으로 달려 갔다. 그런데 닫지 말라고 소리 쳤던 그 창문은 어제 밤 그대로 닫혀 있다. 그러나 검푸른 잎만 담장을 덮고 있을 뿐, 역시 능쿨꽃 부겐빌리아는 다 떨어지고 없었다. 내가 꿈결에 창문을 닫지 말라고 소리친 건 어젯밤 글쓰다 말고 뒤돌아 본, 이미 저버린 부겐빌리아에 대한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늙은 목공이 다듬은 한 토막의 나무 토막이, 피가 흐르는 ‘피노키오’란 장난꾸러기 소년으로 태어 났듯이, 내 작품세계에서 부겐빌리아는 내 손자 손녀들의 어릴적 예쁜 모습 같이 태어 나 내 뒷창문을 통하여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 17년 세월 동안, 이 할애비와 끝도 한도 없는 가을 이야기를 이어 왔었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따라 간 그놈들이 다시 돌아오는 또 다른 가을을 기다릴 것이다. 그 옛날 방학 때마다 내가 찾아 오기를 기다리던 할머니처럼 말이다.


나는 방학 때면 방학숙제장을 가방 속에 챙겨 넣고는 할머니가 계시는 큰아버지 집으로 달려 갔었다. 지금의 창원공업단지 한 모서리의 간이역인 성주사역에서 홀짝 뛰어 내려 손님을 내려 놓고 마산 쪽으로 멀어져 간, 기차의 철길을 깡총깡총 뛰어 걸어 갔었다. 그러다가 ‘살포정’이란 고갯마루 길로 빠져나가 할머니 집으로 걸어가면서, 길가에 선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이란 나무장석 옆의 돌무덤에 돌을 던지면서 그때 나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그리고 길 옆의 물방울이 담긴 망개 잎사귀를 손가락으로 툭 퉁기던, 내 어릴적의 티끼 없는 장난끼가 지금도 이 늙은 입가에 웃음의 주름을 지게 한다.

그런데 내가 할머니 집으로 향해 걸어 가던 그 길은 그 옛날 빈농(貧農)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가 15살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의 길을 가기 위해 진해(鎭海)로 향해 걸어 갔던 바로 그 길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방학의 태반을 할머니 집에서 지내면서 할머니 방에서 잤다. 왼쪽 빰에 엽전 크기의 파란 점이 있고, 입까지 약간 삐뚜러진 할머니였기에 남들은 못 생겼다고들 했지만 내 눈에는 하나도 못생겨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 이불 속에 파고 들어, 바람 나간 풍선 같은 할머니의 젖을 쪼무락 쪼무락 만지작 거리면 할머니는 내 엉덩이를 토닥 토닥 두들겨 주면서 “내 강아지 새끼“라고 했다. "할매, 난 사람인데 와 강아지 새끼라 카노?“라고 물으면, ”니가 강아지 새끼 같이 이뻐서 안 그라나“ 라고 대답한다. 나는 ”아 그렇구나“ 라고 다시 할머니 품에 파고 들기도 했다. 이러한 할머니와 내 어릴적의 대화는 어쩜, 지금의 나와 내 창가의 능쿨나무와의 대화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밤중에 내가 소변이 마려울 때는 할머니 머리 맡에 놓여 있는 분지(요강)에다 누었지만, 대변이 보고 싶을 때는 무서움을 잘 타는 나를 바깥채의 소 마구간에딸린, 통시(변소)까지 데려가 주었다. 여름방학 때 어쩌다 비가 오는 밤이면 할머니는 치마폭을 걷어 올려 비옷 같이 내 머리와 온 몸을 덮어 주었고, 또 추운 겨울 밤에는 내가 늘판지 뒷깐에 앉아 용변을 끝낼 때까지 추위를 견디기 위해 팔짱을 끼고는 마굿간과 변소 사이의 기둥에 기대 서서 기다려 주던 할머니의 그 정(情)이 새삼 그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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