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김미정 ㅣ 아빠와 감나무

2013-11-12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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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나 보다. 마켓에 저마다 오렌지색 꼬까옷을 입고 작은 모자를 쓴 감들이 키맞춰 앉아 있다. 반가운 마음에 제법 크기가 괜찮은 대봉감을 골라 사서 잘 익으라고 부엌 창가에 조로록 세워 놓는다. 감을 좋아해서 우리 집 마당에도 두 그루나 심어놨는데 어찌된 일인지 꽃은 많이 피는데 애기열매들이 하나도 크지 못하고 다 떨어져 버린다. 닭똥도 몇 포대나 부어보고 좋다는 미라클 그로우 스틱도 여기저기 박아놨는데 4년이 지난 지금도 비실비실하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아빠한테 물어보면 딱 좋으련만…

감, 그중에서도 토실토실하고 말랑말랑 잘 익은 대봉감을 보면 아빠의 추억으로 마음이 훈훈해진다. 친정집 정원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참 멋졌다. 계절마다 흐드러지게 색색의 꽃이 피고, 박넝쿨이 너울너울 올라간 원두막 옆에 작은 물레방아가 졸졸 돌아가는 아담한 연못이 있는, 집보다 나무가 높으면 재수가 없다는 풍설을 싹 무시한 멋진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했던 예쁜 정원.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가을 마당이었다. 엄마의 고향인 홍성 옛집 뜰에서 옮겨온 커다란 감나무가 여름내내 뽐내던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이파리를 다 떨궈내고 나면 시원하게 벗은 가지에 대봉감들이 파아란 늦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풍성한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달려 있었다. 매일매일 자식들을 돌보듯이 물을 주고 시절 맞춰 비료를 챙겨주며 장하다고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늦가을에서 서리 내리는 겨울까지 아빠는 아침마다 가지에서 제일 잘 익은 놈들을 골라서 우리를 위해 상 위에 올려놓으셨다.


그해는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더 크게 감들이 열렸다 했다. 동창분들을 만나고 기분좋게 집에 돌아오신 아빠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시질 않았다.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아기의 여권을 만들고 황망한 마음으로 신랑과 도착한 친정집에는 아빠가 그렇게 아끼시던 감들이 이파리 하나 남지않은 가지에서 저무는 마지막 석양빛을 이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풍년이 든 우리집 감들은 집에 오신 손님들과 친척들에게 한보따리씩 좋은 선물이 되어서 아빠의 추억과 함께 그렇게 안겨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그도 알았는가, 다음 해에는 감이 단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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