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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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도 무죄, 그 하룻밤의 카니발

2013-11-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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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리뷰] 더 퍼지

6일 개봉한 영화 ‘더 퍼지’(감독 제임스 드모나코)는 스릴러로서는 결코 새로운 재미를 주지 못한다. 평온한 집안으로 침입한 범죄자들과 싸우는 이런 유의 하우스 인베이전(house-invasion) 무비는 이미 만들어질만큼 만들어졌다. ‘왜 저러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만큼 허술한 구성, 내면묘사 부족으로 인한 인물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 변화는 각본의 한계를 보여준다. 기본 설정은 소설 원작 영화‘헝거게임’을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인한 장기불황, 커지는 빈부격차와 양극화, 툭하면 일어나는 총기난사 범죄 등 미국의 현 상황을 근미래로 확장한 알레고리 영화로서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 이런 면에서 감독의 시도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표현 면에서 불충분한 완성도가 걸리나, 감독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따라가는 방식으로 접근해 보면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300만달러의 저예산 영화이지만 지난 6월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9주 상영기간에 6,447만3,115달러를 벌어들이며 20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그만큼 미국민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덕분에 벌써 속편이 제작 준비단계에 들어갔다.

영화는 2022년 3월21일 ‘퍼지’로 지정된 날이 배경이다. 퍼지(purge)는 상당히 복합적인 뜻을 가진 단어다. 숙청, 제거라는 뜻이며 정화(淨化)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미국을 새로이 건국한 NFA(새로운 미국의 창설자) 정부는 1년 중 단 하룻밤, 12시간 동안만 4등급 이하의 무기로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를 허용한다. 고위공무원만 해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공권력과 응급시스템까지 모두 멈추는 무법천지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득권을 위한 미디어는 “반대론자들은 보호능력이 없는 빈민층, 장애인 계층을 제거하는 수단이라고 비난하지만, 결국 범죄는 줄고 경제는 호황이다” “퍼지가 폭력성과 공격성을 해소하며 빈곤, 범죄로부터 나라를 지킨다”고 세뇌한다. “인간은 폭력적인 동물로, 폭력발생을 하룻밤으로 축소했다”고 친정부 범죄학자의 멘트를 내보내기도 한다. 실제로 완벽한 보안시스템 설치가 가능한 부자들은 이날 실황중계되는 살육과 폭력사건들을 보며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언뜻 이교도 풍습에서 온 가톨릭 카니발(사육제)이 떠오른다. 사순절이 오기 전 가장·가면 행렬을 벌이며 고기 등 음식을 푸짐하게 먹으며 즐기는 기간이다. 사냥하거나 도축해 피를 보는 일이 잦았으며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술과 폭력이 난무하는 민중의 해방구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DNA 분석과 같은 과학수사는 상상할 수도 없던 시대, 탈을 뒤집어쓰거나 분장한 채 이뤄지는 집단폭력의 범인을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사회적 약자가 희생자가 됐을 것은 뻔하다. 동서양을 막론, 축제는 억압된 민초들의 지배층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무마해버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주인공 제임스(에단 호크)는 10년 전에는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했지만 퍼지를 위한 최첨단 보안시스템의 영업사원이 되면서 부유층 동네로 전입한다. 이웃들은 하나같이 과도하게 친절하지만 어쩐지 제임스네 가족만 쏙 빼놓고 자기네끼리 퍼지 파티를 즐긴다. 두꺼운 철판으로 문과 창을 봉쇄하고 보안시스템을 작동시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려 하지만, 제임스의 아들인 변성기 소년 찰리(맥스 버크홀더)가 이 철문을 열어 퍼지의 희생양이 돼 도망 중인 흑인 노숙자(에드윈 호지)를 집안으로 피신시키며 사건이 시작된다. 그를 쫓던 한 떼의 젊은이들이 찾아와 그를 내놓지 않으면 보안시스템을 부수고 집안으로 침입하겠다고 협박한다.

가면을 벗어던진 이들의 리더(라이스 웨이크필드)는 금발에 푸른눈을 가진 전형적인 WASP, 즉 미국 주류 지배계급인 앵글로색슨 백인 신교도다. 스스로를 “교양있고 교육받은 젊은이”라고 칭한 그는 프레피룩(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에 다니는 양가의 자녀들이 주로 입는 스타일)을 하고 있다. 그는 퍼지를 즐기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이고 미국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 하나다. 소름끼치는 웃음을 보이며 친구도 스스럼없이 총으로 쏴버리는 극도의 잔인성을 드러낸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소시오패스 성향으로 사회에서 성공가도를 달릴 것이다.

이럴 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장이라면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와중에 10대의 두 자녀는 도대체 ‘컨트롤’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이없지만 부모에 대한 반항심과 순수한 열정이 뒤섞인 나이대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자. 찰리는 노숙자를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려 하고, 아버지가 반대하는 남자친구를 끌어들인 사춘기 딸 조이(애드레이드 케인)도 제멋대로 군다. 어찌됐든 누구의 손에도 피를 묻히지 않고는 끝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선택의 지점은 남을 밀어내야만 내가 생존할 수 있는 극단적 사회현실의 비유가 되기도 한다. 정말 극중 대사처럼 “너희가 희생하면 우리는 더 좋은 사람들이 되고 세상도 더 좋아지는 것”인가. 과연 공생이라는 가치는 지켜질 수 없는 것인가.

제임스 드모나코(44) 감독은 프랑스 배우 뤼크 베송(54)이 공동제작 한 독립영화 ‘스테이튼 아일랜드’(2009)로 연출 데뷔한 각본가 출신이다. 두 번째 작품인 ‘더 퍼지’에는 할리우드 최고 흥행감독 중 한 명인 마이클 베이(48)가 제작에 참여하며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무모한 운전자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을 한 드모나코 감독은 이를 통해 이번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캐나다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중 현지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사고가 미국보다 훨씬 덜 폭력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국인들의 폭력성에 대해 고찰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미국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지를 상상해 각본을 완성했다.


캐나다와 달리 개인의 총기 소유가 허용되는 이유에는 미국총기협회(NRA)의 로비가 크게 작용한다. 1871년 창립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익단체로 손꼽히며 로비를 위해 연간 1억 달러 이상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의회에 총기규제 법안이 제출될 때마다 총기 제조업자와 유통업자들로부터 거둬들인 자금으로 주도면밀한 로비전을 펼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UN이 비정부기구로 공식 인정하고 있으며, 해외 총기규제 반대운동도 지원하고 있다.

‘미국의 총기문화’(살림문화사)에 따르면, NRA나 미국총기소유자협회 등의 단체들은 수정헌법 제2조를 총기 소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개인이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절대적인 기본권에 속하며, 따라서 이를 통제하려는 어떤 움직임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독립전쟁과 관련된 미국 역사 초기 5명의 대통령들을 포함, 독립선언에 참여한 정치인들을 일컫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권리장전’이라고 불리는 수정헌법 제1조에서 제10조를 만들었다.

극중 NFA는 NRA의 패러디 아닐까 싶다. 퍼지가 끝난 다음날 아침 보도가 그렇다. “총기류와 방범산업의 매출급증으로 주가가 상승했다”는 기자의 목소리가 호들갑스럽다. NFA는 수정헌법 제28조를 만들어 국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퍼지 데이’를 허용한 ‘새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해 학교에서부터 철저히 교육시킨다. 건국의 아버지들을 신성불가침으로 생각하는 열렬 현지 애국주의자라면 비위가 상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의 현재에 대입해보면 감독의 현실풍자와 비판의식을 음미할 수 있다.

<김태은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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