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강정은 | 외나무다리 원수
2011-03-07 (월) 12:00:00
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던데, 나는 가끔 내 마음에 심한 미움으로 남아있던 사람을 외나무다리가 아닌 그냥 편한 길거리에서 갑자기 아무 생각 없이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가끔 생각 해 보았다. 그럴 때도 과연 내 마음에 담고 쌓아두었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 줄 만큼 시원하게 아니면 쿨하게 복수 같은 뭔가를 해 줄 수 있을까?
첫째, 인생은 그렇게 TV에서 보는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상황들이 나를 위해 맞춰주지 않는 다는 게 문제다. 둘째로는 그렇게 재빠른 순발력이 내게는 없다는 것 또한 문제다. 뭔가 그 미운 상대방에게 해 주면 좋을 것 같은 멋있는 말이나 말투 같은 것들을 TV나 책에서 보고 공감하면서 몇 번이나 머릿속에 되뇌인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복수를 할 만큼 그렇게 원수진 것도 아니었지만 오래전에 심한 상처를 준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얘기나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굳어지는 사람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옛날처럼 그렇게 가슴 쓰리게 아픈 감정은 좀 둔해지긴 한 것 같다.
아무튼 결론은 서로 안 마주쳤으면 하는 사람 중에 하나로 정해진 사람.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심하게 편한 차림으로 동네 마켓을 갔는데 멀리서 그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닌데 웬일인 가 말이다. 우리 동네로 이사 왔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공포스러울 정도로 나를 겁나게 하더니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을 주시하며 그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사려던 물건은 뒷전이고 얼른 그 곳을 빠져 나오기 바빴다. 나오는 뒷모습이라도 볼까봐 어찌나 나의 발걸음이 바쁘게 움직이던지 차에 올라탄 후의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우스웠다. 그렇게 나와 운전을 하는데 서서히 조금 전의 조급함과는 다른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빠져나온 내가 억울하기도 하고 기대하지 못한 만남이 될 뻔해서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그 사람의 옆모습이 머리에서 한동안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러면서 엉뚱한 생각 하나가 나의 그런 복잡한 마음을 덮었다. ‘잘 살고 있구나…’ 정말 뜬금없는 생각.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아무래도 그 사람의 모습에서 뭔지 모를 나와는 상관없는 그 사람만의 인생에서 베어 나오는 여유로움일까… 나에게 그렇게 해놓고도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살 수가 있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내 마음엔 그의 여유로움이 내 머리에 가득하다. 아마도 그 여유로움에 나도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렇게 그를 용서하게 될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