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의 일이다. 교통이 현대와 같이 편리하지만은 않았던 당시, 선승(禪僧) 한 사람이 금강산으로부터 전라북도 부안에있는 봉래정사까지 찾아와, 소태산 대종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도(道)를 듣고자 합니다. 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있는곳을 일러주십시요.” 그러자, 소태산 대종사, “도는 바로 당신이 묻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승은 예를 갖추어 예배를올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과연 그 스님은 도를 얻었을까?
우리는 가끔 살아가면서 철학적인 심오한 질문들을 하곤한다. 삶이 무엇일까? 왜 사는 걸까? 진리는 무엇일까? 있다면 어디에있을까? 등등. 옛 선사들이 이러한 질문들을 받았을 때의 답은 어딘지 모르게 뜬금이 없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차나한 잔마시고 가게.” “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뜰앞의 잣나무니라.” 어떤 미국인 여학생이 숭산 스님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사랑이 무엇인가요?” 스님은 다시 그여학생에게, “내가 당신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사랑인가요” 그러자 그 학생은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었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숭산스님, “학생이 나에게 묻고, 내가 학생에게 대답하고,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진실한 소통, 그리고 매 순간 순간 나 자신과의 진실한 만남 속에 바로 우리가 그렇게 찾고 싶어 하는 그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엄마!” 하고 아이가 불렀을 때, “여기있어!”라고 응답하는 순간. “아무게야!” 하고 불렀을때, “네, 저 여기에 있어요!”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서로 온전하게 전달이 되고, 이해가 되며, 아무런 선입관도 없이서로 맞닿았을 때, 이것이 바로 진리의 소식이 아닐까.
현대인은 매일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신문을 보고, 일터로 향한다. 일상의 반복 속에 삶이지루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무엇인가 오감을 짜릿하게해 줄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다닌다. 하지만 어느 것도 영원한 즐거움을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직면했을 때에는 그 새로움에 적응하느라 몸살을 앓고, 막상 그 삶에적응을 하게 되면, 또 새로운 것들을 찾아나선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선(禪)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깨어있기 위해서 명상을 한다. 고요하게 나를 깊이 바라보는 선을통해서 지금 내가 들이 쉬고 내 쉬는 숨이 매 순간 새로워 질 때, 누군가가 우리에게, “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묻게 되면,무어라 대답할까? 오늘도 비가 종일 내린다. 땅 위의 꽃들은 우산도 없이 온통 이 비를 맞는다. 비가 땅에 내려앉을 때마다,비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때마다, 나는 무엇을 찾았는지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