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박명혜 / 라면의 유효기간

2011-01-2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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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보다 더위가 더 느껴졌을 때, 그때 산 것이니 정말 오래됐다. 일본 라면의 박스 가격이 너무 싸서, 잘 먹지도 않는 것을 한 상자나 샀다. 남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국 라면이 매울 때 같이 끓여도 먹고, 찌개에 사리로도 쓰면 된다는 생각에 저지르고 말았었다. 그러나 지금, 유효 기간이 한참 지난 라면이 반 상자나 남아 있다. 이게 다 얼마란 말인가? 싸게 먹겠다고 산 게 오히려 더 비싼 꼴이 되었다. 통째로 쓰레기통에 쏟아 버리려다 봉지라도 뜯고 버리자 싶어 한 아름 안고 마당으로 나갔다. 한 봉지, 한 봉지, 자책감에, 미련에, 아쉬움에 봉지를 뜯다 보니 새삼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오래된 기억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 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난 부모님과 떨어져 외할머니댁에서 몇 개월 학교에 다녔었다. 할머니와 삼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지냈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하루에 한 번은 눈물 바람을 했던 것 같다. 그때 할머니께선 바로 이 라면으로 내 울음을 달래곤 하셨다. 확실치는 않아도 그땐 아직 라면이 흔하지 않았던 때였고, 유난히 국수를 좋아하시던 외할머니는 새로이 등장한 라면을 꽤 좋아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라면도 선물로 들어온 과자, 사탕 같은 것들과 함께 벽장 안에 소중하게 보관하셨었다. 이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많이 우는 날에는 할머니가 벽장 안에 있는 라면을 가져오라 시키셨고, 그러면 난 과자나 사탕을 할머니께 조르지 않아도 먹을 수 있었다. 달콤함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엄마가 보고 싶어 울던 울음도 끝나 있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할머니는 이런 내 마음을 다 꿰뚫어 보시고, 심부름을 시키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할머니 마음은 돌아가시고도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고, 알고 난후에도 잊고 지낼 때도 많았다. 오늘 같은 일이 없었으면 아마도 또 한참을 그때 할머니의 속 깊은 라면 심부름을 떠올리지 못했으리라.

비록 오늘 이 라면은 유효기간이 지나 먹을 수 없지만, 외할머니의 사랑을 떠올려 주는 데는 아직 유효 기간이 충분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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