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나 <수필가>
알래스카를 가다
오늘은 알래스카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날이다. 내일은 떠나야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허전해진다. 마지막 피날레를 ‘쿠퍼스 랜딩’(Cooper’s Landing)에서 래프팅(Rafting)으로 장식하기로 했다.
언젠가 콜로라도 스프링(Colorado Spring)에 갔을 때 사파이어처럼 파란 하늘 아래, 콜로라도 강에서 래프팅을 해보고 싶었다. 그 때 젊은 사람들이 웃통을 벗고 근육질을 뽐내며 따가운 태양아래 이리저리 바위 사이를 헤치며 거센 물살을 타는 것이 부럽기만 했었다. 몹시 위험해 보인 래프팅은 오직 젊은 사람들의 전용물인 것 같아 가버린 젊음을 아쉬워했던 생각이 난다.
여행을 할 때는 대담해 지기도 한다. 약간 걱정이 되긴 했지만 여행사에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일단 안심을 했다.
쿠퍼스 랜딩 알래스카 처녀
능숙한 솜씨로 래프팅 가이드
물벼락에 옷 흠뻑 젖기도
한 시간쯤 운전을 해 쿠퍼스 랜딩에 도착했다. 케나이 강의 부드러운 물살을 보자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도 든다. 저 정도의 물살이라면 아직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젊음이 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감히 내 인생에 래프팅에 도전해 볼 찬스가 또 오기나 할까.
쿠퍼스 랜딩은 앵커리지에서 남쪽으로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역시 케나이 페닌슐라에 속한다.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 여기서 처음으로 금광을 발견한 ‘조셉 쿠퍼’라는 광부의 이름을 딴 도시다. 그러나 알래스카가 미국에 팔리기 훨씬 전에 이미 제정 러시아 엔지니어 ‘피터 도로신’ 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금광이 있음을 인지했었다고 한다.
케나이 강을 끼고 작은 길 옆으로 식당과 캐빈과 래프팅 투어 회사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아무리 작은 도시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식당이다.
구름이 낮게 깔린 것이 또 비를 뿌려 댈 모양이다. ‘디리프티 랜딩’ 여행사는 산장 호텔도 같이 운영하고 있다. 호기심에 여기서 하룻밤을 묵으려면 얼마냐고 물으니 우리가 어젯밤 잤던 캐빈의 3배 값이다. 통나무로 투박스럽게 지은 호텔들이 금방이라도 베이비 블루의 강물에 쏟아질 듯 비탈진 언덕에 걸려 있다.
여행사에서 큼직한 레인 재킷을 하나씩 입혀주고 구명조끼와 레인 부츠도 빌려준다. 쌀쌀한 날씨에 겹겹이 껴입은 옷이 거추장스러운 판에 이젠 아주 드럼통이 구르는 기분이다.
오늘 우리를 안내할, 노를 저을 가이드는 20세의 마리샤다. 알래스카의 스푸르스 나무처럼 큰 키에 건강미가 물씬 풍기는 그녀는 여기서 태어나 학교를 마친 알래스카 토박이다. 우리가 중무장을 한 것과는 달리 그녀는 쫄 바지에 쫄 셔츠, 그리고 하얀 티 셔츠에 구명조끼 차림이다.
발그스름하게 홍조를 띤 그녀의 뺨이 체격과는 달리 그녀의 어린 나이를 엿보게 한다. 내가 춥지 않느냐고 물으니 천만의 말씀이란 듯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가녀린 내 몸도 옷에 파묻혀 뒤뚱거린다. 무릎까지 올라온 크고 흉물스런 부츠 탓일까, 조심스럽게 보트로 내려서던 나는 얼떨결에 나둥그러지고 만다. 출렁거리는 파도에 보트가 흔들려 뒤집혀진 거북이처럼 일어날 수가 없다.
마리샤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보트에 탄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다. 구름은 짙게 끼었어도 비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 래프팅은 순조롭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는 물살이 센 편이다. 그래도 콜로라도 강에 댈 바는 아니다.
우리 일행을 제외한 네 사람 외에 한 사람은 오스트렐리아에서 온 린이라는 여자였다. 린은 이제 49세, 처녀의 몸으로 네 명의 자녀를 둔 중년의 남자와 결혼해 25년을 전처의 자녀들을 키우며 청춘을 바쳤다고 했다. 아내의 희생을 고마워 한 남편이 혼자 편안한 여행을 하도록 그녀에게 휴가를 줬단다. 알래스카 여행을 끝내고 미국의 동부 쪽을 돌아본 뒤, 서부 쪽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래프팅은 3시간짜리로 12마일을 노 저어 간다. 내려가는 도중에 알래스카에 서식하고 있는 식물 발라리언 꽃, 알래스카 북쪽에서 피는 제라니움 등 야생화와 미국 국조인 독수리 발드 이글, 브라운 베어, 무스 등을 볼 수도 있다.
케나이 강, 제일 위쪽은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로 베이비 블루에서 때로는 그린 색으로 물 색깔이 자주 바뀌는 곳이다.
한참 내려가니 러시안 리버(River) 가 나온다. 여기는 케나이 강의 베이비 블루와 러시안 리버의 크리스탈 맑은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고 한다. 러시안 리버를 지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케나이 강 와일드 라이프 레프지(Kenai National Wild Refuge)로 들어선다.
이곳은 그리즐리 곰이나 블랙 베어, 그리고 심심찮게 무스(moose)가 나타나는 곳이다. 물살이 세게 출렁거리다 다시 잔잔한 흐름이 이어진다. 중간쯤 내려오자 볼드 이글(bald eagle)이 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튼 것이 보인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집을 짓고 새끼를 보살피거나 알을 품은 모양이다. 머리가 하얗고 부리는 빨갛다.
이 독수리는 주로 추운 알래스카, 캐나다가 서식지이고 알래스카에 7만마리가 살고 있다. 세계에 서식하는 발드 이글의 반이 알래스카에 살고 있다. 이유는 이곳에 연어 등 먹이가 풍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갑자기 커다란 물살이 보트를 뒤엎을 듯 뱃전을 친다. 느닷없이 솟구친 물벼락에 일행이 속옷까지 다 젖었다고 울상이다. 익숙한 마리샤의 안전 운항으로 승객들은 무사히 육지에 내렸다.
앵커리지로 들어오는 길에 처음 보았던 지진 공원을 다시 보고 해안가에서 마지막 기념사진도 한 장씩 찍었다.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알래스카의 아침은 여전히 겨울을 느끼게 한다. 우리 비행기는 아침 10시에 뜬다. 친구들을 뒤에 두고 남편과 나는 앵커리지 공항으로 향한다. 우리를 태운 운전사에게 물었다. 모든 세상이 눈 속에 덮인 겨울은 어떻게 운전하느냐고. “하얀 눈 위로 하얀 운전을 하지요” 그의 말이다.
올 때는 꼴찌로 왔는데 갈 때는 맨 먼저다. 이것도 인생길과 같은가. 순서 없이 가는 것. 비행기의 창문을 통해 눈 덮인 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하얀 눈 속에 내 맘은 두고 몸만 가는구나.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잠시 후 활주로를 힘차게 발길질을 하며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알래스카 안녕!”
래프팅 자에 세워진 캐빈, 비라도 내리면 그방 함께 쏠려 갈 것같은 이곳은 숙박비가 비싼 게 흠이다.
레프팅을 시작하기에 앞서 안전점검과 주의사항을 듣고 있다. 물살 때문에 긴장의 연속이지만 알래스카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