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년 역사 숨쉬는 시안
2003년에 새로 준공했다는 ‘시안 국제공항’은 현대 건물이어서 고도(old city)를 찾아온 나에게는 좀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었다. 시안 시내까지 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시골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고향 길처럼 정겨웠고, 길 양쪽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분홍색의 복사꽃과 아지랑이가 먼 여행길에 시달려 피곤한 나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8개의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기원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시안은 세계 4대 고 도시(old city) 중에 하나이며,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부터 시작하여 명나라 중기 북경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3,000년 동안 고대 중국의 수도로서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유서 깊은 도시이다. ‘시안’으로 명명되기 전까지 이 도시는 오랜 세월을 ‘장안’이라 불렸다고 한다.
당나라때의 건물 아직도 화려한 자태
진시황·양귀비·장제스 등 소중한 유적
지금은 밀농사·섬유·관광산업 번성
700만의 인구 중 90%가 한족(중국사람-Han), 그 다음으로 몽고족(Mongo), 무슬림(Muslim), 그리고 만주족(Manchu)이 이곳에서 함께 어울러 살고 있다.
중국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인 시안은 물이 넉넉해서인지 밀농사가 제일 큰 산업이란다. 두 번째로 비단을 비롯한 섬유산업, 그리고 세 번째가 관광산업이라 해서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사실 나는 시안에 진시황의 ‘병마용 갱’이 있어 관광이 으뜸인지 알았다.
시안은 성 안의 ‘고 도시’와 성 밖의 ‘신 도시’로 나뉜다.
고 도시는 명나라 홍우왕 2년 1370년에 장안 황성에 기초를 두고 8년에 걸쳐 성벽을 쌓아서 만들었다. 성벽 높이는 12미터이고, 아래 폭은 16~18미터, 위의 폭은 14~16미터로 충분히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넓이이다.
이 성벽은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닐 수 있는데 약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성벽 밖은 물길을 만들어 적이 쉽게 침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 성문을 통해 성 안을 들어 오려면 3개의 대문을 지나야 들어올 수 있는 철옹성이다.
방어목적으로 지은 이 성벽은 현존하는 중국의 최대 규모의 성벽이라 했다.
고성을 들어올 수 있는 네 개의 대문 중 남문이 가장 번화하였고, 한국의 인사동 같이 서점과 문방구가 있는 동네 입구에는 서원문이라 쓴 문이 세워져 있었다.
시안 고도 가장 중심지인 십자로 한 복판에 세워놓은 종이 걸려 있는 종루는 명나라 홍우(Hong Wu)왕 17년에 시작하여 8년에 걸려 건축하였다. 이 종을 쳐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 있었던 실제 종은 현재 비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종각에서 서문 쪽으로 150미터 가면 여러 개의 북이 걸려 있는 고루(drum tower)가 있는데 이 또한 홍우왕 13년에 세웠고,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남문 근처에는 당 나라 시대의 건물들이 화려한 자태로 뽐내며 서 있었고, 그 당시의 가무를 볼 수 있는 곳도 여러 곳이 있는데, (식사를 즐기며 가무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그 가운데 ‘산서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Shaanxi Grand Opera House)가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이다.
이곳에서는 12가지의 각기 다른 맛의 만두를 먹으며 당나라 시대의 가무를 즐긴다.
시안에는 진시황 병마용 갱(terracotta warriors)을 비롯해 한나라 왕들의 왕능(Han Yangling mausoleum), 시안이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아놓은 성벽(city wall),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종각(bell tower), 그리고 북을 달아놓은 고루(drum tower),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화청지, 역대 많은 문필가가 쓴 비석을 모아놓은 비림(Stone Tablet Museum),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며 머무른 대자은사 내에 있는 대안탑(Big Wild Goose pagoda) 등 볼거리들이 많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진시왕 병마용 갱과 화청지, 대안탑이 시안을 대표하는 곳들이다.
화청지는 시안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쯤 떨어진 리산(Lishan)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왕실 목욕탕으로, 옛날부터 화산작용으로 인해 뜨거운 온천수가 콸콸 나와 수나라 때부터 많은 왕과 왕후의 겨울 별장으로 애용되었다고 한다.
얼굴에 흉터가 많았던 진시왕이 화청지에 가서 얼굴을 씻으면 나을 것이라는 꿈을 꾸고 이곳에 와 씻고 난 후에 흉터가 사라졌다고 하니 그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온천을 하였을까?
특히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이곳을 많이 애용했는데 지금도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하던 목욕탕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양귀비!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녀로 불리는 그녀는 719년 사천성에서 태어나 16세에 현종의 제18왕자 수왕의 아내가 되었다가 시아버지인 현종의 눈에 들어 그의 비가 되었다.
온갖 부를 만끽하며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그녀도 756년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현종과 함께 피난을 가다가 백성들과 군사들의 불만과 원성의 대상으로 지목되자 결국 37세의 한창인 나이에 자기발로 절에 들어가 목을 매어 생을 마감하였다.
양귀비가 죽은 후 묘를 만들고 보통사람들처럼 조그만 봉분을 만들었는데 그 무덤에서 좋은 향기가 나기 시작했고 동네 사람들은 밤에 몰래 그녀의 묘로 가서 묘의 흙을 가져다가 얼굴에 발라 보았더니 양귀비처럼 얼굴 피부가 곱고 예뻐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이 순식간에 동네에 퍼지니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밤에 와 흙을 파 가버려 묘에 흙이 남아 남지 않게 되자 묘 주위에 돌을 높이 쌓는 소동까지 났다고 한다. 양귀비는 죽어서도 편하게 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복이 많아서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속수무책으로 아무 방도도 취할 수 없었던 현종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그래서 당대의 유명한 작가 백거이는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의 노래를 지어 ‘장한가’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 이름을 딴 ‘장한가’가 이곳 화청지에서 매일 저녁 공연된다.
이곳에는 장제스 총통이 시안사변 때 잠시 피신하여 머물었던 누각도 산 밑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아직도 벽에 박혀 있는 총알 흔적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리산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어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진시황의 묘를 비롯해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수많은 왕조가 일어났다가 사라진 시안은 지금도 곳곳에 3,000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다. 화려한 고대 양식의 웅장한 건물들이 관광객들을 사로잡는다.
고서와 문필을 파는 상점 입구에 세워진 서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