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친구의 모자 / 김희봉 칼럼 (수필가)

2010-05-04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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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간(幹)이가 왔다. 20여 년 전 서울서 보고 처음이니 참 오래 만이다. 힘든 이민 생활의 오르막길을 오르다 숨이 턱에 찰 때면, 문득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도 내가 보고싶어 명퇴 후 첫 나들이에 날 찾았다고 한다.

간이를 처음 본 게 고등학교 입학식에서였다. 경상도 깡촌에서 상경한 그는 수줍은 웃음에 눈매가 선했다. 나도 피난 갔던 부산에서 중학을 마치고 서울로 온 터라 벙벙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세련된 서울 친구들의 끗발에 주눅이 들어 촌닭들처럼 운동장 한 귀퉁이에 서서 남쪽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곤 했었다.

그때 그는 쭈그러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중학교 때 쓰던 모자를 개조해 새 모표만 단 게 분명했다. 윤기 흐르는 고등학교 지정 새 교모엔 흰줄이 두 개나 둘러져 창 옆 두께가 깊었다. 그러나 그의 낡은 모자엔 줄을 억지로 대고 바느질한 표가 났다. 내 모자도 낡았었다. 가세가 기울어 새 모자를 사지 못했다. 어머니는 모자 뒤를 조금 찢어 자꾸 커 가는 내 머리에 맞춰주셨다.


엄한 규율부 선배들이 등교 길이면 어김없이 나와 그를 불러 세웠다. ‘야. 너네들 촌놈 티 내냐? 이런 모자는 규정에 어긋난단 말이다." 그런데 학교 규정도 문제였지만 숫기 없는 내겐 남들의 시선이 더 괴로웠다. 등하교 길에 버스에서 예쁜 여학생이 내 가방을 받아주기라도 하면 내 모자만 쳐다보는 것 같아 괜히 머리를 외로 꼬곤 딴청을 부리곤 했다.

그러다가 고1 첫 모의고사에서 촌놈 둘이 큰일을 내고 말았다. 간이가 전체수석을 하고 내가 차석을 했다. 서울 놈들 별 것 아니네 싶어 자신감이 솟았다. 그 다음 부턴 누구도 교모로 트집잡는 사람이 없었다. 간이는 고교 3년 내내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과외도 하지 않는데 모든 과목이 골고루 빼어났다. 서울대 전체 수석을 바라보는 학교의 보배가 되었다. 어느 날, 갓을 쓰고 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간이 아버님이 상경하셨을 때 학교선생님들이 교문에 도열해 맞으시던 아름다운 모습이 영화장면처럼 선하다.

간이는 경세의 꿈을 안고 출세의 길로 나아갔다. 당시 최고 직장인 한국은행에서 금융전문가가 된 후, 청와대 경제요직으로 옮겨갔다.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성품, 성실한 신앙과 놀라운 기억력에 바탕을 둔 미래에 대한 통찰력 등으로 우리는 그가 때가 되면 유능한 장관이나 재상이 될 것으로 믿었다.

20년만에 본 간이는 좀 수척해 보였다. "내가 한창 일 할 나이에 명퇴를 하고 한 일년간 시름시름 앓았다"고 했다. 연륜 따라 눈매는 좀 쳐졌어도 선한 눈빛은 여전히 총총했다. "권력의 핵심 속에 파고들기 위해 동물적인 근성으로 경쟁해야하는 출세지상주의의 조직 속에서 나는 늘 외톨이였다. 권력의 감투는 내게 참 어색했다" 하며 웃었다.

그는 요즘 헐렁한 등산 모자를 샀다고 했다. 아내와 청계산을 오르고, 주말농장에서 상추, 쑥갓, 아욱 등 다양한 푸성귀를 키운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내 손으로 씨를 뿌리고, 풀을 뽑고, 물을 주며 키워 그 수확을 나눠먹을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고 뿌듯하다고 했다. 아이들과 같이 흙을 만지면서, 그 옛날 아버지가 쉰둥이인 자신에게 천자문을 가르치시고, 자연의 순리대로 자족하시던 모습이 새삼 슬기롭게 여겨진다고 했다.

"요즘 내가 잘 하게 된 게 또 있다. 평생 음치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반주하는 딸을 따라 성가대에 서게 된 게 참 행복하다. 그리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글에 대한 재미도 붙었다" 고 했다. 이순의 나이에 아마추어 예술가의 고깔모자를 쓰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간이를 보며 문득 서양속담이 떠올랐다. "1등이 꼭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음먹은 것을 전보다 더 잘하는 게 진정한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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