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폴 손 칼럼

2010-03-31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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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자세를 보면, 자신을 비켜가는 화살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설교는 저 서람이 좀 들어야 하는 것이고, 저 설교는 그 사람이 들어야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은 “해당 사항 무”로 처리한다. 성경 말씀을 자신에게 하나님이 직접하시는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구름 잡는 설교에 휘파람부는 신자가 되고만다.

어느 작고하신 권사님의 이야기이다. 육이오 때, 공산군에게 총살당하는 남편을 외아들과 함께 목격해야 하셨던 분이다. 타지에 살고 계셨던 분인데 한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왔으니 예배를 인도하라신다. 난감했지만 말씀을 전했다. 도중에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셨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이었다.

성경 속의 고린도 전서 13:4 ? 13:7 까지의 말씀을 예로들면, “사랑”이란 단어를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서 읽을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홍길동이란 기독교인이 이 구절들을 “홍길동은 오래 참고, 홍길동은 온유하며, 홍길동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로 읽으면서 자신이 그렇게 되어 가도록 하는 노력이 있어야 거듭나게 된다.


성경 말씀 중, 또 많이 읽히는 구절은 시편 23편이다. 이 시편은 우리들이 기도 속에 통상 말하는 “주시옵소서”라는 말이 없다. 피동형의 말이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의 성경을 읽을 때에는 주종 관계를 분명히 해서 읽어나가야한다. 다시 홍길동의 예를 들면, 이 여섯 구절의 시편은

“여호와는 길동의 목자시니 길동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가 길동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길동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길동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길동이와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길동이를 안위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 길동이 원수의 목전에서 길동에게 상(床)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길동의 머리에 바르셨으니 길동이의 잔이 넘치나이다. 길동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길동이를 따르리니, 길동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된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부분이다. “나의 이름을 위하여”가 이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이므로 주종관계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자기 과시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집사, 장로, 권사 등등의 직분과 호칭이 자기 신앙 과시로 오용 또는 남용되고 있음도 본다. 불행히도 성경은 집사의 수를 적시하지 않았다. 이 교회에서 쉽게 장로로 장립되어서 저 교회로 옮겨가는 분도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명예 어쩌구 저쩌구 하는 호칭도 있고 보면, 십자가 앞에서 우리 인간들이 부끄러워해야한다. 성경 속의 “자칭 큰자”라는 시몬의 이야기를 기억해야할 것이다 (사도 행전 8:9).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는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자기 과시를 위해 좋은 이름두고 호칭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본다. 이름만 달랑 가지고 한인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상들이 양반 제도 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모두 다 양반이고 싶어한다.

내일은 성 금요일이다. 자신의 피조물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직접 피조물들을 찾아오신 그리스도가 그 구원의 목적을 달성하신 날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과시하고자하는 우리들의 우둔함을 깨우치시고자 못 박히셨다. 그러므로 나를 과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신음하시는 그리스도를 외면하지말고, 나의 이름이 생명록에서 빠지지나 않았는지 십자가 주위로 조심스레 살펴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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