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 김정옥(자영업)

2010-03-19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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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벽을 넘는 일이 생긴다 해도

이젠 나이를 잊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눈에 익은 흑백사진 하나를 본다고 하자. 병풍 앞에 앉아 온갖 음식을 한상 차려받고 자녀들에 둘러싸여 환갑잔치의 기쁨에 깊이 패인 주름을 잡으며 웃고 있는 노부부의 사진을. 그야말로 너와 나의 일이었을 테지만 이젠 거의가 환갑잔치를 한다면 ‘웬일이니’ 한다. 그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때쯤이 되면 여하튼 손주들을 얻게 마련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호칭만은 들을 수 밖에 없다. ‘난 아직은 할머니가 되기 싫어!’하는 맘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인가. 하지만 곧 알게 된다. 이 시기야말로 인생의 또 다른 축복인 것을.
7년 반 전에 태어난 첫 외손자 덕에 나도 할머니가 되었다. 얼마 전엔 그 외손자가 다니는 작은 크리스챤 학교에서 Grandparents’ Day가 있어서 모든 스케쥴을 미루고 6 시간을 달려서 갔다. 사돈과 만나 꽃 한 송이씩을 받아들고 나란히 예배실인 대강당에 앉았다. 우선 강당을 가득 메운Grandparents에 놀랐다. 단장들도 곱게 했지만 표정들도 어찌나 상기되고 아름다운지. 휠체어에 앉은 분도 많았고 지팡이를 짚는 분도 많았지만 손주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대단해서 플로리다와 하와이, 그리고 메인, 텍사스, 아이오와 등등 미 전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랬으니 한 학년씩 나와 발표를 할 때마다 그 반응이 어떠했을까. 유쾌한 휘파람이 섞인 환호와 기립박수까지 터져나왔다. 교실에선 손주를 껴안고 손주의 의자에 앉아 웃고 쓰다듬고 칭찬하고.
훗날 손주들이 우리를 생각할 때 달콤한 그리움에 젖어지기를 나는 원한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우린 손주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먹이고 달콤한 케익에 때로는 떡라면도 끓여서 웃음과 비밀을 섞어가며 맛있고 즐겁게 먹는다. 부모들 몰래 한 번씩 애들을 풀어 놓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보아왔다. 말귀도 못 알아들을 것 같던 그 어린 아기적에도 제 부모가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면 마치 이해라도 한 듯 조용히 태도를 바꾸고, 집에서 정해 놓은 룰을 어쩌다 지키지 못했을 땐 그 안쓰러운 ‘타임아웃’이라는 것을 혼자 떨어져 묵묵하고 정직하게 치러내던 모습들을. 어디 그뿐인가, 약속이라는 것은 꼭 지켜야 하고 노는 시간 잠자는 시간마저 분명히 알고 사는 걸. 이렇듯 잘 자라는 손주들이기에 달콤하게 흔들어 놓는지도 모르겠다. 먼 훗날 어쩌다 벽을 넘는 일이 생긴다 해도 툭툭 털고 일어나 새 길을 찾아 척척 걸어 갈 힘이 될 것이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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