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 안희경 (번역작가)
2010-03-17 (수) 12:00:00
불교방송 프로그램 가운데 <차 한잔의 선율>이 있다. 클래식 음악과 여러 초대 손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하는 아침프로다. 그래서 종교를 넘어 다양한 청취자들이 모였다.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인연이 되었던 이해인 수녀님도 가끔씩 연락을 주셨다. 어느 날인가는 <그리움>을 듣고 음성 메시지를 남겨 주셨고, 사티의 피아노곡을 듣고 쓰신다며,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참으로 고운 수녀님이시다. 그 즈음 서울에 오셨을 때 주신 선물이 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수녀님이 주신 걸로 떠올려 진다. 다름아닌 법정스님의 사진이다. 명동 성당에서 강론하시는 스님의 흑백 사진으로 가톨릭 신문 어딘가에서 오려 코팅하신 모양이다. 불교방송 PD였던, 불자인 내게 준 선물이다. 그리고 다음 날 함께 법정스님을 뵈러 갔다. 교보문고 주최 강연회였다. 동해 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걸린 잠수정을 ‘원시 인간의 도구에 갇힌 첨단 문명의 무기력함’에 빗대 말씀해주셨다. 한 시간 강연 속에서 모두가 물진 문명의 허허로움을 깨달으며 자본에 의해 짓눌려 왔던 체증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이해인 수녀님은 따로 스님께 인사도 드리지 않고 자리를 뜨셨다. 이 것이 내게 처음 마음으로 다가 온 법정 스님의 모습이다. 더없이 맑은 수녀님이 존경하는 그 분으로 그제서야 법정스님의 무게가 진정으로 다가온 순간이다.
그리고 얼마 전 다시 한 번 법정스님의 혜안을 느끼게 되었다. 스님의 글 속에서다. 스님이 젊었을 때, 어느 노스님이 비서에서 보았다며, 미래에 뿔이 하나 있는 일각수가 나와 온 국토를 유린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셨다 했다. 당시에는 흘려 넘겼는데, 지금 보니 그 일각수가 포크레인이라는 것이다. 거대한 전동 삽이 앞장서 파헤친 건설 붐이 지구의 재앙을 몰아오고 있다 한다. 이렇듯 권력과 자본의 본질을 단 한 줄로 꿰뚫어 주시던 스님이 가셨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 진정한 스승을 만날 수 있을지 답답함이 차오른다. 어려울 때마다 여러 고아원과 시설 앞에 놓여지던 무명의 쌀 가마니들도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듯싶다. 이제 그 뜻을 우리들이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잊지만 힘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