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 안희경(번역작가)
2010-02-17 (수) 12:00:00
시어머님은 설거지를 잘하신다. 문간방 새댁이 어머님 설거지 하는 걸 유심히 보고 한 말이다. “아줌니 설거지 잘하시네. 빨리 하는데 안드럽고.” 어머니의 위생개념은 철저하다. 그런데도 참 빠르다. 빠르기로 하면 나도 뒤지지 않았다. 허드렛일 하는데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초텍크 정신으로 집중했다.
그러나 요즘은 시간이 전보다 세 배쯤 더 걸린다. 그릇을 깨끗이 하는 주체가 나의 손과 비누가 아니라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다. 환경 수세미도 물의 힘을 빌려 실력발휘를 하는 거라고 본다.
9년 전쯤 대우에서 세제가 필요 없는 세탁기가 나왔었다. 혁신 기술이라고 했다. 그러나 비밀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 옛날 냇가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절렁절렁 흔들기만 해도 때가 빠지고, 돌에다 쳐대면 찌든 때도 날아가듯 물의 자정 효력을 빌린 것이다. 물론 어려운 과학 원리들도 있었다. 전기 분해장치 비슷한 발표라고 기억한다.
어렸을 때, 절에 가면 커다란 함지박에 물을 받아 설거지 하는 모습을 보았다. 3백 명 분의 그릇들이 아주 더러운 물에서 다음 물로 다시 꽤 맑아 보이는 물로 옮겨 가다가 마지막엔 햇볕이 드는 건조 선반에 포개어 졌다. 그 걸 보고 속이 메슥거렸던 기억이다. 뭐든지 흐르는 물이 제일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흐른다는 운동의 힘만 믿었기에 수압을 높여 씻어댔다.
요즘은 그래도 늦게나마 설거지 통에 모인 물을 이용해 초벌 씻기를 한다. 깨끗한 그릇을 골라 졸졸 흐르는 물에 헹구다가 물이 고이면 수도꼭지를 잠그고 나머지 그릇을 그 물에서 헹군다. 다시 흐르는 물에 씻고 건지기를 반복하면 깨끗해 보이던 그릇에서도 찌꺼기가 나온다. 세 바가지 물이면 충분한 설거지가 되었다. 물 재활용 덕분에 설거지도 허드렛일이 아니라 지구를 구하는 명상이 되었다. 시간은 더 오래 걸리나 귀해졌다.
시사프로 피디를 할 때다. 환경운동연합 의장이 출연하였는데, 스튜디오로 가야 하는 찰나, 멈칫거리더니 그 분은 남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커피를 정화시키느라 욕조 한 통의 물을 쓰는 것 보다 직접 하는 것이 도리라고. 더 자주 지구인의 도리를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