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우수정(주부)

2009-12-17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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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정때문에 산다고들 하지요? 그놈의 정때매, 뭐 그러지 않습니까.
정, 미운정 고운정, 그 놈의 정…정이란 무엇일까요? 정이란 사랑과는 질이 다른 어떤 감정일까요? 아니면 사랑의 다른 차원일까요? 오늘은 하루종일 정이란 단어가 제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정때문에 산다는 말, 젊은 부부, 특히 신혼 부부에게는 잘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단물빠진 껌을 씹듯, 그렇고 그렇게 사는 늙수그레한 부부들이 대개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 놈의 정때매 산다고. 왜 앞에 꼭 ‘그 놈의’ 라는 말을 붙여야 하는지,하긴 감정 표현을 거꾸로 하길 즐기는 우리 민족의 정서때문인지도 모르죠.

옛 어른들이 자식에게 뻑하면 ‘어이구, 이 놈의 왠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정이란 단어에는 풋내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야 비로소 생기는 곰삭은 감정일거란 말이지요.


20여 년 전 직장 내 담당 과장이었던 곽 과장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아리따운 여성분과 오랜 연애끝에 결혼을 했는데, 신혼 여행을 다녀온 직후 그의 아내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죠. 뇌졸증이었습니다. 그후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5년 넘게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그를 보면서, 그의 변함없는 헌신과 사랑에 감탄하는 반면, 과연 그게 사랑일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회식자리에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위한답시고 한 마디씩 합니다. 그 정도면 됐다고, 할만큼 했다고, 젊은 나이에 언제까지 자식도 없이 그렇게 살거냐고…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죠. 내가 버리면 그 여자는 살 수가 없어. 나 역시 그 여자없인 하루도 살 수가 없고…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아, 사랑이구나… 싶었습니다.
정말 사랑이었던겁니다. 섣불리 동정심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어찌나 부끄럽던지요.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어느 선교사님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떠나는 바로 그 이유가 내겐 정작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될 때,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젊고 찬란했을 때는 쉽게 떠날 수 있지만, 늙고 추레해지면 떠날 수 없는건, 그 놈의 정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그만큼 깊어진겁니다. 아, 그러고보니 정이란 철든 사랑을 말하는 것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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