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떠나는 한국농촌 현실에 가슴 아려
고추장에 찍어먹는 생더덕 안주맛 일품
어디에서 잘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이 두 가지가 절실한 문제인 것을 집을 떠나보니 알겠다. 내 땅에 왔는데 어디인들 한 몸 뉘일 곳 없으랴 싶기도 하고,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별을 벗하여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특별한 추억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버리고 떠났는지 농가 한 채가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지붕도 벽도 무너지고 마당에는 풀이 수북하다. 동네 앞으로 냇물이 흐르는 산 좋고 물 맑은 고향이지만 먹고 살기가 팍팍하면 저렇게 집을 버리고 정든 땅을 떠날 수밖에 없다. 무너져 가는 농가가 쓰러져 가는 한국 농촌의 현실을 말해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린다.
길가에 ‘화장실’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재래식 변소다. 그렇잖아도 뱃속이 불편했는데 변소에 쭈그려 앉으니 고향집 툇마루에 걸터 앉은 듯 아늑하다. 코를 지르는 냄새, 구석에 잿더미가 쌓여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잿가루가 날리는 모습, 몇 년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멍석이 말린 채 먼지를 듬뿍 쓰고 길게 놓여 있는 모양, 천장에 얼기설기 엉켜 있는 거미줄까지도 모두 정겹다. 이렇게 편하고 시원하게 볼 일을 본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나물 캐러 왔던 사람들이 귀가를 서두르고 있다. 나물 보퉁이를 차에 싣는다. 인근 도시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인가 보다.
사람들은 하루에 얼마 정도를 걷느냐고 묻는데,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간다는 게 정확한 답이다. 걷기시합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만나 얘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지체될 수밖에 없다. 오늘은 백리쯤 걸었다. 오면서 사람들을 만났던 시간을 감안하면, 새벽부터 많이 걸어온 셈이다. 무릎이 좀 시리다.
용바위 마을회관을 지나 버스정류소 앞 가게에 도착했다. 비비빅을 하나 사 먹으며 정류소 앞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게 주인에게 이 마을에서 민박을 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그럴만한 집이 없다고 한다. 어찌하나 생각하다가, 지난 번 무주에서 만났던 한봉진 경감이 “혹시 잘 곳이 마땅치 않거든 파출소에 가서 부탁해 보세요” 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신변의 안전은 물론, 파출소에 가면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그래, 그러자. 파출소가 어디쯤 있냐고 물으니 바로 다음 마을인데 1킬로 남짓 될 거라고 한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무릎이 아파 한 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다. 큰일 났다. 걸어야 할 길이 창창한데 무릎이 고장 나면 그야말로 큰 문제다. 마침 차 한 대가 지나간다. 손을 들어 사정을 말했더니 마침 파출소 부근에 가는 중이란다.
덕산면 파출소 바로 옆에 성당 공소가 보였다. 조배를 드리고 싶어 파출소에 가기 전 공소에 먼저 들렀다. 아담한 건물이다. 나이 든 수녀님 두 분이 저녁식사를 하다가 성당 문을 열어주신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수녀님이 잘 곳이 있는지 물으신다. 파출소에 가서 알아볼 참이라고 하니 잠깐 기다리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거신다. 민박을 하는 교우가 있는데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민박집 아주머니와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집 부근에 도착했다.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미인봉’이란다. 그러고 보니 영락없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다. 미인봉에 얽힌 덕주사 전설을 들려준다. 미인봉 근처 계곡에 덕주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의 스님들에게 안 좋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단다. 전전긍긍 하던 어느 날 도승이 나타나 미인봉 아래에 남근상을 세워주면 화를 면할 것이라 하여 그대로 했더니, 문제가 없어졌다는 얘기다. 우리 집 뒤뜰 제법 우람한 레몬나무 한 그루, 여직 레몬 한 개 열리지 않는 이유가 언뜻 짐작이 간다.
덕산면 수산 2리 ‘시루봉 민박’. 냇가 언덕 위에 지은 집이다. 공사 중이던 아저씨와 맥주 한 잔 마시는데, 엇 썬 생더덕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사근거리는 맛이 안주로 일품이다. 저녁 밥상에 맛있는 두릅전이 올라왔다. 더덕과 두릅은 지금이 제철이라지만, 저것들을 캐오느라 온 산을 헤맸을 그 수고와 정성을 헤아려 본다.
냇가에 돌멩이가 널려 있다. 비 오는 밤이면 저놈들이 서로 부딪치며 굴러가는 소리가 온 산을 쩌렁쩌렁 울린다고 한다. 흐르는 냇물에서 돌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서양 속담도 있듯이 돌은 돌끼리 어울려 산다. 바닷가 조약돌도 저희끼리 소리치고 부대끼는 세월을 살면서 반들반들 다듬어진다. 파도는 그들을 살짝 들었다 놓아줄 뿐이다. 밤이 깊어간다. 내일은 제천까지 들어갈 예정이다.
밭과 농가, 그리고 냇물과 산이 어우러진 덕산면의 한가로운 농촌 풍경. 저 멀리 미인봉이 보인다.
농사만으로는 살기가 힘들어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우리 농촌에서는 버려진 집들이 적지 않다. 거의 폐허가 돼 버린 한 농가.
정찬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