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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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촌 철로엔 무심한 관광열차만

2009-07-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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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문경 - 도보 국토 종단기 <12>

국토종단을 시작한 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피곤이 쌓였는지 곤히 자는데 아내가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떠보니 어둑어둑한 새벽이다. 오늘은 무리해서라도 문경읍에 도착해야 하니 서둘러야 한단다. 주말이면 미국에 혼자 돌아가야 하는데 내일 새재는 넘고 가야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래, 그러자” 처음에는 꿈도 야무지게 태백산까지 정했다가, 다음에는 월악산, 줄이고 줄여 문경새재로 마지막 목표를 정했는데 그 꿈마저 이루지 못한다면 되겠나 싶어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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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숲과 강이 어울려 자연의 멋을 뽐내고 있는 진남교 부근 풍경


푸른숲·강 어우러진 진남교 ‘한 폭의 그림’
도자기 명장 백산 선생 만나 장인숨결 실감



식당에 갔는데 입이 깔깔하다. 하지만 걷기 위해선 먹어야지 별 수가 있나. 된장국을 주문했다. 입맛이 없을 때, 물이 바뀌어 배탈이 걱정될 때, 특별한 메뉴가 눈에 띄지 않을 때 가장 무난한 음식이 된장국이다. 식당 벽에 “커피는 셀프입니다”는 글이 붙어 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식당에 붙어있는 글귀다. 아내는 커피나 한 잔 하겠다고 ‘셀프’로 가져온다. 요즈음 “커피를 영어로 뭐라고 하지?” 하고 물으면 “셀프”하고 답변한다는 우스갯말이 등장했다고 한다.

국토종단을 계획할 때 많은 분들이 만류했었다. “그 먼 길을 걸어간다니 말이 되느냐” “한국의 길이 좀 위험하냐”는 등. 그런데 시작하고 보니 어느새 보름이 지났고, 목표의 절반이 가까워 온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라는 돈키호테의 한 구절을 생각하며 길을 재촉한다.

서벌면, 공검면을 지난다. 평야지대다. 상주는 삼백(三白) 뿐 아니라 배도 유명한 모양이다. ‘상주 배 고장’이라는 큰 간판이 서있다. ‘경상도’라는 이름이 경주의 ‘경’자와 상주의 ‘상’자로 비롯된 것이라며 식당주인이 자랑을 했었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저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산의 힘일 터이다.

성지여중고 사인이 보였다. 북 상주 아이시를 지나 지도를 보니, 충주행 95번 국도를 따라 가는 게 가까워 보인다. 고속도로를 따라 걷는데 귀가 멍할 만큼 시끄럽고 위험하다. 4킬로쯤 걷다가 점촌휴게소에서 내렸다. 도로공사 여직원이 깜짝 놀라며 국도를 걷는 것은 위법이라고 말해줬다. 하마터면 문제가 될 뻔했다. 점촌을 거쳐 지방도로를 따라 문경읍으로 가라고 일러준다. 지름길로 가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돌아가게 되었다.

불정역 부근을 지나는데 썰렁하게 보이는 학교 건물이 보였다. 탄광이 한창일 때 광업소 아이들을 위해 지었던 학교라고 한다. 이제 학교는 건물만 남고, 탄을 나르던 철로도 인근 진남교를 오가는 관광열차가 대신했다. 철길이 한가하게 누워 있다. 옛 시절이 그리운가보다.

진남교에 도착해 차가운 아이스케익을 사는데, 벚꽃 필 때 오시지 그랬냐며 주인이 아쉬워한다. ‘경북 제일경치<고모성 진남 휴게소>’ 빛바랜 사진이 휴게소 안에 걸려 있다. 밖에 나와 다시 둘러보니, 꽃이 피고 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절경이다.

꽃. 올해는 원 없이 꽃길을 걸었다. 3월 초, 종단을 시작할 무렵부터 개나리, 진달래, 벚꽃, 산수유, 복숭아, 싸리꽃 등. 막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반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함께 올라오는 중이다. 생각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 저 많은 꽃들이 모두 나를 반겨 피어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산천이 달라 보였다.


산을 휘감아 강이 흐른다. 강과 산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지만, 강둑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어 비로소 아름다움이 완성된다.

저 강산을 바라보면서 북녘 산하를 떠 올린다. 그 땅에 사는 형제들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반백년 넘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 한 쪽은 푸름이 출렁이는 울창한 산이 되고, 다른 한 쪽은 바라만 보아도 배고픈 민둥산이 되었다.

사람은 부모를 닮기보다 그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고 하였지만, 사람은 먼저 그 산천을 닮는다고 했다. 메마른 산천을 닮아 아이들이 행여 마음조차 가난하게 될까 봐 걱정된다. 애당초 하나였듯이, 결국 하나가 되어야 할 우리의 핏줄이 아니던가.

문경읍이 가까워온다. ‘문경 전통찻사발축제’를 선전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망뎅이 가마가 이 부근에 있고, 자기를 만드는 곳도 서른이 넘는단다. 도자기 명장, 무형문화제 제도를 만들어 도자기를 위해 살아온 분들을 우대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백산 김정옥 선생을 만났다. 열여덟 살부터 51년째 도자기 일을 해 오고 있는 분으로 내년이면 일흔 살이다. 도공 7대를 이어왔다고 했다. 도공 7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고요하다. 자그마한 마을이 저녁안개에 쌓인다.

발길을 재촉한 탓에 내일 문경새재를 넘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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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에 그림을 그려넣고 있는 백산 김정옥 선생. 자기는 그의 손을 거치면서 새 생명을 얻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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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읍이 가까워지자 길가에 세워진 장승이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겼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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