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과 금강 분수령에 세워진 표시판. 비가 내려 동쪽으로 가면 낙동강, 서쪽으로 가면 금강이 된다는 의미다.
봄을 맞아 길가에 피어 오른 민들레들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국토종단 보름째. 어제 멈췄던 모서로 되돌아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갔다. 붐벼야할 터미널이 썰렁하다. 상주가 발전하려면 시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목에 힘을 빼야 한다던 어제저녁 버스운전사의 말이 생각났다. 터미널 벽에 걸린 큰 액자가 눈에 띈다.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데에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맥아더 장군의 글 중에서 가려 쓴 글이다. 우리 집 거실에도 걸려있는 ‘아들을 위한 기도문’의 일부분이다.
곶감의 고장 아니랄까 ‘감순이 택시’도
농민회 관계자 만나 FTA 진지한 토론
▲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복숭아 꽃이 탐스럽게 느껴진다.
모서에 내려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모자를 눌러 쓴 아주머니가 포도밭에 비닐지붕을 씌우고 있었다. 햇볕을 잡아두어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란다. 캘리포니아 포도가 좋은 이유를 알겠다.
길가에 “양계장이 죽든지 모서면민이 다 죽든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기에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대형양계장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의사표시라고 설명한다. 좀 더 걷다보니 “지역생존권 위협하는 정신병원 설립 결사반대”라는 내서면 이장협의회가 내건 현수막이 보였다. 결사반대 할 일이 많은 지역인가보다. 주민의식이 그만큼 앞섰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노란색 민들레가 길가에 모듬 모듬 피어 있다. 바로 옆에 금강과 낙동강 분수령 표지판이 서 있다. 빗방울이 떨어져 동쪽으로 가면 낙동강이고 서쪽이면 금강이라는 뜻이다. 재미있다.
미국에도 록키산 봉우리에 떨어진 물방울이 동쪽으로 흐르면 대서양, 서쪽이면 태평양이라는 말이 있다. 순간의 선택으로 갈 길이 달라지는 것이 물방울뿐이겠는가. 선택의 여지도 없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또 한 두 사람 뿐이겠는가.
아내의 배낭이 무거워 보여 물병을 내 쪽으로 옮겼다. 등산전문가들이 무게를 줄이기 위해 칫솔 손잡이를 반으로 잘라 짐을 꾸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렇게 걸어보니 알겠다. 촌노가 경운기를 몰고 간다. 농촌의 대표적인 운송수단이자 복합농기구다.
택시가 지나가는데 ‘감순이 택시회사’란 이름이 붙어있다. 이곳 상주 곶감의 유명세를 빌린 이름이다. 길가에서 아주머니가 쑥을 캐고 있는데, 86세와 88세인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고 한다. 쑥떡을 해서 자식들이 오면 먹일 작정이란다. 얘기를 하면서도 손이 쉴 틈이 없다. “죽으면 썩을 삭신 놀리면 뭐한다냐” 하시며 반들반들한 장독을 닦고 또 닦곤 하시던 우리 어머니가 생각난다.
후득 후득 비가 내린다. 우비를 꺼내 입었다. 종주 시작 후 처음 빗속을 걷는다. 자동차가 물장을 치고 지나간다. 갓길이 좁아 큰 차가 지나가며 바람을 일으키면 몸이 휘청거리며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식량은 무기다! 식량자급률 법제화 하라!” 상주시 농민회에서 내건 플레카드다. 어, 저 사람들은 좀 다르네. 만나보고 싶어 전화를 걸었더니 상주 가는 길목에 있는 농민주유소에서 만나자고 한다. 회장이 출타중이라며 부회장과 사무총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악수를 나누었다.
이 주유소는 농민회 운영기금 마련을 위해 설립한 직영업체라고 소개했다. 직영약국도 있다고 했다. 상주시 인구가 25만이었는데 지금은 10만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값싼 중국농산물의 유입으로 농사를 지어 수지타산을 맞출 수가 없어 농업인구가 계속 줄고 있단다.
상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농민 주유소. 상주농민회가 운영기금 마련을 위해 직영하는 곳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농민단체에서 WTO와 FTA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반대가 아니라 대책을 세워달라는 주장이라고 한다. 자유무역이 양국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고, 관세를 낮춰 무역량을 늘이고 각자 경쟁력이 있는 제품 생산에 주력하는 게 좋다는 것도 안다. 우리가 자동차를 팔아 이익을 얻은 대신 상대방으로부터 농산물을 수입해주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식 아닌가. 그렇다면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쪽에서 손해 보는 쪽을 위해 이익금으로 손해의 일부를 보전해주는 것이 형평의 원칙에 맞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길이지 않는가.
이를테면 캘리포니아 칼로스 쌀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경우에 현제 한 가마 16만원하는 쌀값이 반값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는데, 손해액만큼 보충해주지 않으면 농민들은 망할 수밖에 없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는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달라는 것이지, 농민들이 무조건 자유무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생존, 그것은 모든 것에 우선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아니던가. 상주의 밤이 빗소리에 잠긴다. 내일은 문경새재로 떠날 예정이다.
정찬열
도보 국토 종단기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