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분은 미주 한인사회에 인간적인 기본 소양과 자격이 불분명한 목사가 양산되고 있음을 걱정한다. 같은 지면에는 LA 제일 큰 한인교회의 집안싸움이 법정으로 옮겨 이전투구 양상이고, 꽃다운 한인 소녀가 ‘신의 이름으로’ 라는 어른들의 무지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보통사람들의 싸움은 화해가 가능한데 교회의 패싸움은 화해가 불가능하고, 목사가 끼어든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고 한다.
신은 무엇인가. 수많은 논쟁이 있지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은 없다. 하나 신은 영원하다는 것, 인간은 유한하다는 것에는 이론이 없다는 것, 거기서 한번 생각해보고 싶다.
신이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실존하는 모든 존재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생성, 변화발전, 사멸의 과정은 곧 실존의 증거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비실존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은 비실존이므로 영원하고, 인간은 실존이므로 유한한 것, 그렇게 보면 신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신이 영구불멸의 진리라는 것은 크리스천, 또는 신을 믿고자하는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한정된 관념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는 아닌 것이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인간 생명이란 한번 뿐이고 유한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닐까.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 생명이 무슨 가치가 있고 귀중하겠는가. 또 ‘영생을 얻으리라’ 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영생을 얻어 배고프지도, 춥지도, 걱정거리도 없다면 무엇으로 그 영겁의 세월을 소일하고 견딘단 말인가.
과연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생존을 위한 힘겨움, 유한한 죽음의 공포로 비롯된 종교는 없어지고 필요 없게 될까. 내 생각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면 분명히 “당신은 죽을 수 있습니다. xxx 를 믿으면 당신은 죽을 수 있어 영원히 안식할 수 있습니다”하는 종교가 생겨나지 않을까 한다.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수많은 목자들이 신의 달콤한 구원의 약속을 전달하고 있지만 지구상의 수많은 전쟁이 종교로 인해, 종교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고, 인간은 수없이 신의 이름으로 죽어간다. 선진국의 가축 사료 15%만 있어도 아사를 면할 수 있는데 그 조차 얻어먹지 못해 지구 곳곳에서 굶주림에 하루에 수천 명씩 죽어 가는데, 기약도 없는 해방, 구원의 약속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종교 논쟁은 부질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미주 한인사회는 특정 종교의 논리면 무조건 선이라는 식의 무례함과 독선이 너무 심한 것 같다. 또 미국의 신앙인과 한국의 신앙인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정신세계의 신앙과 현실세계를 대부분 구분할 줄 알고, 정신세계의 신앙과 현실세계와의 조화를 지혜롭게 이룬다면, 후자는 신화와 역사(正史)의 차이마저 구분을 못하고, 신화의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맹목적인 종교관과 나만이 옳다는 아집이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것 같다.
보통사람, 신을 안 믿는 사람이 볼 때에도 보기 좋은, 아름다운 테레사 수녀님 같은 그런 모습의 신앙이 참 신앙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