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단일기/ 품 안의 자식

2008-03-28 (금) 12:00:00
크게 작게
천경주(상항한국학교 교사)

딸아이는 자기 몸집만한 핑크색 여행용 가방과 두툼한 슬리핑백을 현관에 가지런히 세워두고 곤히 잠이 들어 있다. 저녁 내내 준비물을 적은 종이를 여러 번 확인해 가며 친구들과 가는 일주일의 여행에 들떠 있더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보수적인 아빠 덕분에 제대로 된 슬립오버 파티조차 해보지 못한 딸아이는 중학생이 된 후, 학교에서 수업의 연장으로 실시하는 outdoor school, 즉 일종의 수학여행인 이번 여행을 몇 달 전부터 무척 기다리는 눈치였다. 딸아이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는 공식적인 첫 외박 인 셈이다. 아이가 집을 비운 동안 밀려있던 집 안 일들을 말끔하게 해치울 요량이었는데, 막상 딸아이를 태운 파란색 스쿨버스가 떠나고 나니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 것이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내 모든 에너지는 딸아이에게 쏟아졌다. 딸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게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나의 모토였는데 어느새 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울고 웃고 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빈 방을 보면서, 대학 간 자녀들이 곁을 떠난 뒤 한동안 무얼 할 지 몰랐다던 선배 엄마들의 푸념들이 이해가 되었다. 자녀들이 떠난 뒤 생긴 정신적 시간적인 여유를 새로운 인생의 기점으로 삼고 다시 분주해 지기 시작하는 선배 엄마들의 모습들이 딸아이의 짧은 여행을 계기로 내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딸아이와 남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다보니 정작 시간과 여유가 주어져도 어찌 할지 모르게 되었던 것이다. 대신 무슨 일만 생기면 엄마를 찾는 딸아이나, 자는 아이 얼굴을 몇 번씩은 들여다봐야 안심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 모녀의 관계가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의 교육자인 도로시 피셔는 “어머니는 기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댈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했다. 아직 사춘기의 터널을 다 지나지 않은 아이를 둔 엄마의 입 찬 소리일지는 모르지만 아이가 집을 떠나고 난 후 애완동물에게나 헛헛한 마음을 쏟고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딸아이의 여행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아이를 싸고돌지 말자. 나는 나대로 저는 저대로 홀로 설수 있게끔 지금 부터라도 연습을 해야겠다. 남의 도움 없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도록 삶의 밑천이 되는 소중한 경험을 갖게 될 기회를 빼앗지 말자. 자식을 위해, 자식을 통해 사는 게 아니라 자식에게 잘 사는 본보기를 보여 주자.’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 신이 나서 떠났던 모습과는 반대로 피곤에 지쳐 돌아 온 딸아이의 모습을 보자 이 견고한 다짐과 반성은 순간 무너져 버렸다. 집이 최고고 엄마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그 말에 지난 일주일 동안 다잡았던 마음이 풀어진다.

다시금 너는 내 기쁨이요 내 걱정덩어리임을 확인하며 마음이 즐거워진다. 여행 후 이틀 내리 잠만 잔다. 깨어나자마자 배고프다며 툴툴댈 아이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면서, “그래, 아직 몇 년 만 더 이 즐거움을 느끼자. 나중일은 나중에...”라고 생각하며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우리 모녀관계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