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송일란(SV한국학교 교사)
2008-02-22 (금) 12:00:00
마켓에서 깨달음을 얻다.
비 오는 날씨건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씨건 요동치 않으리라 맘먹었건만 날씨 탓으로 맘이 뒤숭숭하다. 퇴근길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러 마켓에 들렀다. 약 30분간 둘러보다 나올 때 내 손에 들려진 건 달랑 우유 하나!
치즈 코너에 섰다가 기겁을 하고 물러섰다. 종류별로 크기별로 그 다양함에 기가 죽을 지경이다. 미국마켓이라 그런지 소스들도 엄청났다. 내가 40년을 더 산다손 치더라도 1년에 두 개씩 먹어도 평생 다 못 먹게 생겼다. 주스를 둘러보아도 그냥 누군가가 이것이 너한테 제일 좋은 거라며 턱하니 하나 안겨주면 좋겠다 싶었다. 해물 코너든 과자 코너든 여러 인종의 입맛에 맞게 갖다 놓느라 그랬는지 유난히 종류가 다양하다.
그러다 우유 하나를 자신 있게 집어 들었다. 만족감이 밀려온다. 목적을 달성한 느낌이다. 필요한 것을 골랐으니 사실 더 바랄 것도 없다. 진열된 온갖 것들을 스쳐 지나면서 곧장 카운터로 간다. 더 이상 둘러보며 진을 빼고 싶지도 않다. 그러는 순간 머리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우유 하나 사기 위해 내가 허비한 시간은 대략 30분. 우유 하나 사면서 나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로 인해 시간낭비에 정신적으로는 더 피곤해졌다. 도대체 하루에 똑같이 밥 세 끼 먹고 사는데 왜 이리 많은 부수적인 것들이 필요한 것인지, 소박한 밥상을 꿈꾸는 나에겐 이 모든 것들이 필수품이나 선택 품목으로 여겨지지만은 않는다.
그 넘쳐나는 물건 중에 내게 꼭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정보 또한 넘쳐나는 시대다. 아무리 정보가 많더라도 내게 필요한 정보만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내게 알맞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둘러볼 필요가 있다. 비행기를 타야 할 사람이 서울역에 가 표를 끊겠다고 하염없이 서 있는 것은 아닌지, LA로 가야 할 사람이 시애틀로 가는 지도를 뽑아들고 나서는 것은 아닌지.
교사의 첫 번째 자격은 지식이 아니고 사랑과 격려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쏙쏙 집어 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동쪽으로 가야 할 아이에게 동쪽의 정보를, 서쪽으로 가겠다는 아이에겐 서쪽의 정보를 정확히 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교사이겠지 싶은 깨달음이 돈 계산을 하면서 든다. 깨달음으로 머리에 반짝반짝 불이 들어와서인지 뒤숭숭했던 마음은 깨끗이 사라졌다. 아이들에게 이번 수업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줄까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