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웅수 회고록-휴전 후의 한국군
2008-02-14 (목) 12:00:00
육군 군수 참모부장(17)
나는 쓰라린 경험도 군수 참모부장직과 같이 갖고 있다. 그것은 내가 군수 참모부장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났다.
황인성 예산처장이 유학길에 오르게 된 자리에 육군대학 교관으로 있던 4기생 이병간 대령이 부임했다. 그는 군수 계통에 경험은 없었으나 나는 그의 평을 듣고 언젠가는 같이 일하고 싶어서 이종찬 육대 총장을 어렵게 설득해 황 대령의 후임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본인이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나 나의 강권으로 이루어진 인사였다. 그는 후일 3성장군이 되어 육군의 작전 참모부장을 거쳐 합참 부의장을 마지막으로 육군에서 예편되었다. 현재의 국군 전쟁박물관은 이 장군의 업적으로 성취되었으나 아깝게도 그는 벌써 고인이 되었다.
송요찬 장군에 의해 육군 감찰감이 된 한신 장군은 육군 조달감실에서 오래 조달과장으로 있던 안용학 대령에 관한 입찰 사건을 부정으로 의심해 당시 병참 차감이었던 김형덕 대령과 군수 참모부의 예산 책임이 있다해 예산과장 이정순 대령을 안 대령과 함께 고발했다. 나는 처음부터 믿지 아니하였다. 안 과장은 10년 이상 조달감실 요원으로 있었음으로 의심을 할 수 있을망정 병참감실 차감과 군수 참모부 예산과장을 공모자로 기소한다는 것은 그들의 평소의 인격으로 보나 직위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감찰감은 신임되어 업적이 필요한 듯 했다. 만약 직책상 책임이라면 병참감이나 군수 참모부라면 예산처장이나 군수 참모부장이 책임을 져야할 문제였다. 사람을 보고 하는 고발밖에 되지 아니했다. 나는 이 사건으로 남달리 청렴결백 강직으로 평을 받고 있던 한신 장군이 이중적 성격자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시 미국 시찰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나는 이 일로 병참감 김계원 장군과 의논한 결과 차감이 관련될 수 없다는 의견을 들었다. 나는 참모차장 김종오 장군을 만나 항의를 했다. 만약 선처되지 못하면 미국 시찰에서 돌아와 육군의 사건화를 위해 앞장서겠다고 위협을 해놓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본인들이 유죄 판결로 군복을 벗게 돼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사건화 시키지 못했고 지금도 당시 내가 죄 없는 부하들을 보호 못한 일에 대해 수치심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 임명된 이종찬 국방장관에게 항소를 내 김형덕, 이정순 대령 공히 무죄가 되었다. 그 후 이 정순 대령은 경리감을 거처 준장으로 예편했으나 김형덕 대령은 군에서 일찍 나와 충남방직 이사를 거쳐 충남 홍성에 청운대학을 창립, 오래 동안 총장직을 맡은 교육계의 큰 기둥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 두 사람에게는 인생의 빚을 진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 돈독한 관계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들의 성실하고 정의로운 인생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다.
나는 4.19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군의 환경과 윗사람들에 대한 밑의 사람들의 힐난을 보면서 다행히 중장의 계급은 아니었으나 마음의 가책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새로 임명된 최경록 참모총장도 나에게 군단장으로 전출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그가 최영희 총장의 차장으로 있었을 때의 나의 소원을 상기시키며 계속 9월부터 시작하는 국방연구원 행을 요구하였다. 최소한 어지러울 때 선배나 진급이 빨랐던 친구들의 희생 대가로 얻는 영전은 하지 말아야 나의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와 군대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할 기회를 가지며 약한 나의 건강도 돌봐야겠다는 결심에 변동이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1960년 9월초에 시작되는 당시 수색에 위치했던 국방연구원의 학생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