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한국인의 정치수준

2007-12-31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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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규진 (전 인권문제연구소 총무)

2007년 대선이 예상대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당선으로 싱겁게 끝났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보여준 행태는 아직도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후진국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매 선거 때마다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정당간의 합종연횡이나 그러한 시도들, 정책의 선명성을 드러내고 그것을 적극 홍보하는데 역점을 두기보다는 상대방 후보의 약점을 파고들기에 급급했던 각 정당 후보들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증폭시키고 급기야는 대통령 직선제 이후 역대 선거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치적 수준의 저급함이 비단 정치인들만의 탓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한 정치인들을 바로 우리 국민들이 선출하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의 정치수준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통치 때와 1980년대 신군부 강압정치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정치를 인권탄압정치, 독재정치라고 규정하고 있을 때도 군사정권하 집권당의 지지율은 항상 30%를 상회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무고한 목숨을 잃어가는 그 순간에도 그러한 집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정권과 그 정부가 유지되어졌다. 보편적 가치와 정서를 무시한 채 자신이나 집단의 이익을 좇아 사고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저급하게 여긴다.
우리는 드라마를 볼 때는 선과 악의 구분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각 정치인이나 그 집단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계획을 세우는지 알 수가 없으므로 옳고 그름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오히려 악하고 부패한 무리는 더욱 집요하고 그 연대의 끈이 강해서 잘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한번 정권을 잡으면 연대를 통한 그 정치적 파워가 막강해서 국민이 현혹되기 쉽다. 군사정권의 예에서 보듯 그들은 언론을 장악하여 국민의 눈과 입을 막아버리고 그들만의 논리를 세운다. 대표적인 것이 안보논리요 경제논리다.
어쩌면 우리 국민은 군사정부 시절 독재가 옳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북한의 남침야욕을 과장한 안보논리에 속고, 자신의 지역과 그 지역 출신 사람이 그래도 우선이라는 자신의 감성적 판단에 속아 자신만의 차선을 택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오래도록 지탱하게 되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한국 대선 전 미국의 주요 언론은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경제냐 윤리냐’라는 내용으로 한국 유권자의 표심이 무엇에 의해 좌우될지 조심스럽게 진단한 뉴욕타임스의 글은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꼬집는다. 미국과 같은 정치선진국에서의 윤리문제는 대선 본선에 이르기도 전에 다 걸러지는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너는 가난하지만 떳떳하게 살래, 아니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배부르게 살래?’하고 묻는 말과 같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도둑질을 해서라도 배부르게 살고 싶다’라는 답을 택했다. 한국정치사의 또 다른 퇴보를 기록한 것이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지식인들은 또다시 ‘역시 한국은 돈 많고 배경 좋으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만사형통’이라는 ‘유전무죄’의 데자부(Dejavu) 속에서 자고(自苦)하며 방황하게 될 것이다. 정치인들은 계속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으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뱃지를 달려고 하고 자신이 뿌린 만큼 챙겨가려고 국민을 쥐어짤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그런 정치인들 가운데 우리의 대통령을 선택해야 하는 괴로운 일을 감내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개신교의 장로님이다. 국정운영이 특정 정파의 이해에 기반하지 아니하고 종교적 양심에 기반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또 그는 학창시절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경력이 있다. 최소한 그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의 두 가지는 많은 중도개혁인사들이 통합신당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지 아니하고 이명박 당선자를 지지했던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다.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다 부패의 고리를 끊고 기본적인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 우리는 이명박 당선자에게 늘 그가 주장하는 대로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하는’ 정치를 기대한다.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부패가 없는 진정한 보수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그럴 때에 국민 또한 이명박 당선자나 한나라당의 과거의 모습을 문제 삼지 아니하고 새로운 정권에 기대를 걸고 힘을 보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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