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법의 명화 “보기에 좋더라”

2007-05-15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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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상

▶ 석강

“보기에 좋더라” 태초의 주인이 천지창조 작품을 지은 후에 감상 감명의 말이었는데…
역사 이래 수많은 화가들이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믿음처럼 이상세계의 실현에 도전해왔으며 지금도 이어지는 창조와 창작이 세계 곳곳에 많아 가히 볼만하다. 상상의 날개로 다른 세계를 날고 싶으면 그림을 보자. 머리로 판단하거나 논리를 내세우지 말고 그냥 느끼자. 이상의 꿈을 찾아 만일 내가 새가 된다면 어디서 무엇을 할까?
그 답이 그림에 있다면 화가는 하늘 향한 새가 되어 ‘노래의 날개 위에’ 무대에서 ‘꿈속의 고향’을 노래한다. ‘시인의 사랑’을 읊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금강 선경에서 록키 선경까지 넘기도 하고 거기에 매료되어 신선을 자처하는 착각으로 축지법의 도술도 보여준다.
그것은 보는 이에 따라 화가와 합일될 때 기쁨을 얻는다. 그 기쁨을 얻은 이의 길을 인도하는 인간 향상의 역할까지 한다. 그게 큰 보람이자 보면서 즐거움을 갖는 이유이다.
좋은 그림과 못한 그림의 구별은 주관적이다. 그냥 이성을 보는 눈으로 읽고, 첫 만남의 순간을 만끽하고, 보여지는 것에 빠져보자. 화가의 의도를 읽고 느끼며 자기의 경험과 결부시키지 말고, 냉정하게 왜 내가 이 그림에 빠져있나를, 아니면 이 그림이 왜 싫은가 원인을 찾자.
일단 내 마음에 딱 드는 그림이라면 본인에게 좋은 그림이다. 그림이 주장하는 바가 강하면 직관으로 느낀다. 그러나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도 있다. 화가는 때로 관자에게 판단을 맡긴다.
그것은 우연성을 내포한 즉발적인 행위현상을 내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믿고 있는 고정관념이 깨진다. 그러니 자연히 보는 이는 바보가 된다. 바보는 천재의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냥 바보로 족하고 보자. 그림을 가장 쉽게 알려면 바보로 접근하면 개안이 되어 잘 보인다. 결국 작품은 인생의 총체이고, 아름다운 인간 그 자체가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인격과 좋은 생각, 좋은 소재, 좋은 느낌이 명품을 낳는다’는 말로 이야기되고 그림을 보고 그 뜻을 느끼는 데는 학문의 높고 낮음에 있지 아니하다. 그래야만 그림이 간직하고 있는 진실을 공감하며 감명을 받는 가슴 뭉클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좋은 그림을 그린 격 높은 화가의 경지는 화법이 있는데서 없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니 그림을 보는 이도 당연히 보는 법이 있는 데서 없고자 해야 합당하다고 하겠다.
화가와 보는 이는 무법에서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이니 오직 이 만남의 요령이 있을 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의 시작이 처음에는 손재주가 있어 손끝으로 그리다가 철이 들면 머리를 써서 그린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도가 트면 뜨거운 가슴으로 그리게 되니 참 그림이 그려지는 무법에 들어선다. 그러면 손재주가 있어서도 아니요, 머리를 써서도 아니요, 가슴도 아님을 알고 비로소 깨달음을 그린 참 그림, 작품이 남게 되고 이것을 보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감명을 주는 위로자의 역할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을 찾고자 하는 데는 화가나 보는 사람이나 찾는 길이 같고, 그 근본은 “보기에 좋더라”고 말한 주인의 말을 닮아가는 오직 한 길 뿐인 것이 확실하다.

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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