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왕조가 기울기 시작할 때부터 등장한 맹렬 여인 한명을 뽑으라고 한다면 바로 명성황후일 것입니다.
하나 전쟁 중에도 부모상을 당하면 군복무를 면하고 집에 가서 3년상을 지내도록 한 전통 유교가 정신적 지주였던 사회에서 자란 명성황후셨으니 투철한 애국관, 민족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 같고 오로지 하늘 같은 남편이 고종 임금이었으니, 처음에는 시아버지 대원군이 거머쥐고 있던 정권을 뺏는 것으로부터, 이후 청나라 일본 러시아의 힘겨루기에 이리저리 외교력 발휘하며 남편인 고종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소위 정치자금 또 현대식 군을 길러내야 하는 군비 등등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자금 확보 중 소위 ‘평양감사’로부터 걷어 들이는 것이 제일 크고, 가장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조카뻘 되는 민 모를 평양감사에 임명하고, 자금 조달을 맡겼던 것 같습니다.
사실 자금 조달이 정상적인 세금을 걷어 들이는 것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가렴주구(苛斂誅求)라는 말대로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고 짜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양감사 민 모가 자금을 잔뜩 모아서 한양으로 보낼 때 즈음하여, 그만 일본 공사가 소위 ‘낭인’이라고 막부가 무너진 후 떠돌이가 된 사무라이들을 앞세워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워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서 러시아 공사의 보호를 받는 소위 ‘아관파천’이란 창피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민 모 평양감사가 모아 두었던 그 자금을 누구에게도 줄 수 없고, 지금까지 얼마인지도 모르나 좌우간 큰돈이 그냥 민 모 평양감사의 개인 소유가 된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성들의 피와 땀, 눈물의 자금이 그 후 민 모씨가 S 여자상업고등학교, P 여자고등학교 등 학교 설립도 하고, 여러 학교 재단에 많은 자금을 희사했으니 그 자금 형성 과정과 차후 그 자금 사용은 참으로 ‘세상만사’ 아무도 모른다는 한마디 자탄의 소리가 납니다.
내가 왜 뜬금없는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느냐 하면 며칠 전 한국 TV 위성 중계를 보니 ‘테마가 있는 남산 한옥마을’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그중 아름다운 두 채의 한옥이 있는데 하나는 철종의 사위 박영효의 집을 옮겨놓은 것이고, 또 한 채가 바로 민 모 평양감사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손녀가 살던 종로구 관훈동에 있었던 집을 옮겨 놓은 집입니다. 내가 그 손녀딸의 아들과 친구였던 고로 TV에서 보였던 저녁에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글공부 하고 있던 방이 내가 뒹굴며 놀았던 방 같아 몇 줄 써 보았습니다.
이영묵/워싱턴 문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