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건망증이란 글을 쓴 후

2007-01-16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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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생각

▶ 이영묵/ 워싱턴 문인회

나의 ‘건망증’이란 글이 신문에 실린 날 집사람이 제가 가여워 보였는지 저녁 식탁에서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 하더군요. 그날 신문에 실린 내용이 며느리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안 보냈으며, 어쩌면 돈 봉투를 보냈는데 집사람이 ‘삥땅’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쓴 내용을 보면서 한 이야기 입니다.
“여보, 당신 우리 DVD 보다가 갑자기 기계가 움직이지 않고 서 버려서 못쓰게 된 것 알지 않소. 그래서 며느리가 크리스마스 선물은 DVD 플레이어를 사오겠다고 했고, 우리 TV에 비디오, 케이블, 거기에 스테레오 마이크 등등으로 연결된 전선이 너무 복잡해서 기계만 가져다 놓고 가벼렸는데 딸애가 와서 다 전기선 연결하지 않았소.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가 ‘삥땅’했다고 신문에 냈으니 참 기가 막혀 할 말이 없구려.”
그 말을 듣고 보니 저 스스로 창피하고, 또 어찌 그리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는가 해서 무조건 제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습니다. 그런데 또 어제 아침에 다시 자괴감에 빠진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참 잠을 잔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새벽 4시쯤 됐더라구요. 그런데 잠은 안 오고 해서 뒤치락거리다가 세상을 풍자하는 ‘패러디 꽁트’나 하나 쓰겠다고 이리 저리 공상하다가 줄거리 하나를 세운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줄거리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이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이름이 입안에서 뱅뱅 돌면서 나오지 않더라고요. TV 화면에 콧수염을 한 그가 ‘나에게 꿈이 있소’라는 연설 장면도 생각이 나고, 그 뒤에 항상 서 있던 잭슨 목사도 생각나고, 그와 정반대의 세상을 산 말콤 X의 이름도 생각이 나고, 심지어 볼티모어 시내 들어가는데 그분의 이름을 딴 고속도로 표지판까지도 생각이 나기도 했으나 그분의 이름이 무진 애를 써도 그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이름이 안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이름을 찾아 보려고 A B C 순으로 아담스, 알렉스, 벤자민, 버나드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오전 바쁜 일이 있어 그만 모든 것을 잊고, 일을 하다가 예의를 차려야 할 분과 한 한국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했습니다. 아, 그런데 이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름이 딱 떠오르더라구요. 식사 상대방의 말씀을 좀 심각한 모습으로 대해야 했었는데 그만 희죽거리며 웃는 예의에 벗어난 짓을 했습니다.(저는 그 분이 이 글을 읽었으면 합니다.)
나의 사무실로 오다가 보니까 OO 루터런 교회가 있더라구요. “참, 루터교에서 마틴 루터, 마틴 루터에서 마틴 루터 킹, 이렇게 연계 했으면 될 것을…”하면서 후회도 되더라구요. 좌우간 사무실에 도착해서 의자에 앉자마자 ‘마틴 루터 킹’이라고 잊지 않으려고 크게 써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줄거리를 쓰려고 앉아 있었는데 믿으시거나 안 믿으시거나 아 글쎄 그 줄거리가 무엇이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안나니 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한 줄의 글도 못썼습니다.
참담한 마음을 접고, 좀 우울한 마음을 벗어버리자고 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앞에는 TV를 켜놓고 밥상 위에는 신문을 펴놓고 보면서 정말 느긋한 시간을 즐기겠다고 하고 막 포도주 한 모금을 ‘코로 마시고, 입으로 마시고, 목젖을 촉촉이 적시며 아스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때르릉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니 이 선생님, 왜 사람을 모두 불러 놓고 왜 여지껏 안 오십니까. 여기 4명 다 와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약속은 내일 아닙니까?” “아이고 이 선생님, 수요일은 교회 수요 예배 보러 가는 사람이 있어 다 모이기가 힘드니 목요일에 만나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목요일이 아니고 내일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여하튼 빨리 나오세요.”
급히 차에 오르면서 혼자 투덜댔습니다.
“아닌데, 분명 내일 만나자고 한 것 같은데…”
이영묵/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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