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레닌그라드의 겨울은 민에게는 참을 수 없는 추위다. 모스크 모양의 금빛 돔들이 겨울 햇빛에 눈이 부시도록 반짝였다. 그는 긴 코트를 몸에 딱 붙도록 여몄다. 그래도 찬바람이 쏙쏙 속살을 쓰렸다. 사실 이까짓 추위가 뭐람. 배가 퉁퉁 부어오르는 희를 생각하면 참아야지. 유리처럼 투명한 얼음바닥을 스키를 지치듯 막스 호텔로 달려갔다. 차가 길 들여 놓은 얼음길은 더욱 미끄러웠다.
민은 하마터면 곤두박질할 뻔했다. 그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현, 미안하다. 희가 너에게 갔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냐. 내가 희를 너무 고생시킨 탓이다. 현아 용서해라. 덩치 큰 도어맨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밍크, Happy New Year”라고 큰 목소리로 인사하는 바람에 민은 뉘우침을 접었다.
셋은 고등학교서 대학 졸업까지 합창단에서 맺어진 친구였다. 희는 약대를, 민은 법대를, 현은 의학을 공부했다. 민은 좋은 집안에서 부유하게 자라 늘 찻값과 밥을 샀다. 현은 가난한 집 사정으로 가정교사를 해서 학비와 생활을 해결했다. 희는 시골서 유학와 두 남자친구 도움으로 객지의 외로운 생활을 이겨냈다. 서로는 형제처럼 친했다. 스스로도 이 만남이 운명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격 없이 사랑은 싹텄다.
대학을 졸업하자 민은 사단 헌병소대장으로, 현은 의무 중대장으로, 같은 사령부에 근무를 했다. 희는 매 주말마다 곱게 싼 도시락을 갖고 면회를 왔다. 민은 큰 키에 자상함까지 갖춘 호남이고, 현은 작은 키에 곱슬머리를 한 지적이고 순진했다. 희는 청순하고 아리따웠다. 시골 부모가 둘 중 한사람을 골라야 한다 라는 주문은 지킬 수가 없었다. 두 친구를 좋아라고 바라보는 기쁨도 이들의 제대와 함께 사라져갔다.
현은 희가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를 원했다. 미국 병원에서 인턴 초청장도 왔다. 민은 몇 번의 고시에 낙방하여 우울해 있었다. 훗날 희를 더 편안하게 할 사람은 현이라고 희와 현을 일부러 피하기까지 했다. 이때 현은 아무 말도 없이 뉴욕으로 떠났다. 민은 몰래 인천에 있는 카지노에 일자리를 얻어 나타나지 않았다. 희는 약국에 파묻혀 눈물로 이 아픔을 이겨내야만 했다.
어느 추운 겨울, 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민이 만취한 채로 약국에 나타난 것이다. 비틀거렸다. 그를 방에 누이고 안정을 시켰다. 민이 안정을 찾을 때쯤 부모가 약국에 들어닥쳤다. 그리고 희에게 결혼을 종용했다. 희는 얼른 승낙을 했다.
결혼 1년도 되지 않아, 민은 러시아로 발령이 났다. 그의 장래를 위해선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현은 한국에 있는 동창의사로부터 희가 초기 간암이라고 알려왔다. 현은 숨이 막혔다.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벽에 걸린 둘의 사진을 쳐다봤다. 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은 눈을 감았다.
파란 하늘이 보이는 창으로 부터 햇빛이 희의 얼굴을 간질렀다. 희는 눈을 살며시 떴다. 앞에 선 푸른 수술가운을 입은 의사가 수술 모자를 벗었다. 곱슬머리에 맺힌 땀방울이 반짝였다. 현이 말했다. 수술이 잘 됐어. 내가 미국서 배운 것을 다해봤지. 현의 뒤에선 키 큰 남자가 땅에 무릎을 꿇고 희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겨울 햇볕이 희의 얼굴을 붉게 만들고 있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