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사람
2006-12-12 (화) 12:00:00
▶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룩은 아이들처럼 첫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색으로 화려했던 단풍잎들이 모두 떨어진 지 꾀나 오래된 듯싶었다. 아이들이 캐럴 연습을 다 마치고 교회를 떠나가고 룩은 그냥 피아노 앞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 봤다. 첫눈이 올 듯싶어 기다리기도 하듯이.
아버지는 눈이 오는 겨울을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경영하시는 잡화상에서 이맘때면 하얀 눈을 기다리셨다. 눈이 오기라도 하면 점포를 비우고 밖으로 뛰어 나가셨다. 그리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상점에 오는 손님에게 캔디며 초콜릿을 듬뿍듬뿍 집어 주셨다.
아버지는 강원도 산골에서 나셨다. 겨울에 눈 덮인 산등성에서 손수 만드신 스키를 타셨다. 그리고 읍내에 가셔서 꼼꼼히 모은 돈을 내고 스케이트를 즐기셨다. 미국에 이민 오셔서 눈이 많은 북쪽에 자리잡으심은 눈을 좋아하시는 때문일 것이다. 휴일이 오면 아버지는 보온병에 커피와 우유를 담은 배낭을 메고 겨울등산을 가셨다. 따라 나선 룩을 추울새라 집에 두고 다니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코치를 구해서 룩에게 빙상을 가르치셨다. 룩은 시퍼런 얼음 위를 죽어라 달리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틈만 있으면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를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점포 문을 열기 전에 스케이트장에 룩을 내려놓고 고단하시면 벤치에 누우셔서 룩의 연습광경을 참관하셨다. 아버지가 귀를 상하신 것을 알 때쯤, 훈련의 보람이 있어 룩은 주 경연에서 1등을 했다. 국가대표 후보로 추천을 받기까지 됐다.
그날도 도서관 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친구가 말을 더듬었다. 룩에게 아버지가 점포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셨다는 비보를 전했다. 룩은 준비하던 LSAT를 접었다. 17살 아이의 총에 맞아 돌아가신 것이다. 룩은 법대 가는 것을 포기했다. 아버지 점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학대학이 있었다. 국가대표선수로 발탁되었다는 통지도 왔다. 며칠 동안 룩은 아버지가 다니시던 산을 오르내렸다. 눈덩이가 얼굴에 부딪혀 왔다. 차가운 눈을 부러 씹었다. 눈은 끝없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하얗게 하얗게.
신학대학은 생각보다 엄격하고 어려웠다. 아픔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더 어려웠다. 룩은 가장 빈민가를 택하여 봉급이 없는 전도사직을 택했다. 그들의 말과 억양을 배웠다. 눈덮인 코트에서 아이들과 농구를 했다. 아이들은 좀처럼 룩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룩은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그들에게 갔다. 악보 없이 성가를 쳤다. 칼날같이 지키는 시간을 그들의 시간에 맞췄다. 점점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기숙사문을 두드렸다. 룩은 마다않고 사감 몰래 집나온 애들을 재우고 다음날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아이들이 때를 지어 룩을 따랐다.
기다리던 눈이 창문을 두드렸다. 흰 눈이 창살위에 쌓여서 그림엽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룩은 교회의 긴 의자를 바라봤다. 혹 아버지가 누워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지. 인근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룩의 빈 마음을 그득히 채워오고 있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