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면을 만드는 ‘화’는 어떤 열인가

2025-12-25 (목) 07:57:07 정호윤 예담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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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을 이야기할 때 한의학에서는 자주 ‘화(火)’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실제로 잠이 안 오는 사람들을 보면 몸이 긴장되어 있고, 얼굴이 달아오르며,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으며, 밤이 되면 오히려 머리가 더 또렷해지고, 생각이 멈추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모두 한의학에서 말하는 몸에 열이 오르는 현상, 즉 ‘화’가 원인이 된 생리 현상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몸이 따뜻해야 잠이 온다”고 말한다.

불면을 만드는 ‘화’는 어떤 열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한의학에서 불면의 원인으로 말하는 화는 대부분 위로 떠오르는 열이다. 심화는 가슴과 머리를 달구는 열이고, 간화는 긴장과 분노가 쌓여 위로 치솟은 열이다. 음허화동은 몸을 식혀줄 음이 부족해 상대적으로 열이 도드라진 상태를 일컫는다.
이 열들의 공통점은 머리와 가슴을 각성시키는 열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얼굴이 붉고, 입이 마르며, 밤이 되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다. 자려고 누우면 생각이 많아지고, 잠들어도 자주 깨며 꿈이 많아진다.


이때의 열은 몸이 건강할 때 나타나는 따뜻한 상태가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 과하게 생성된 열이 밑으로 내려가지 못해 머무는 열, 즉 정체된 열인 것이다. 즉, 잠을 방해하는 화는 단순한 ‘온기’가 아니라 아랫부분이 차가워서 위로 ‘떠오른 열’이다.
불면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몸을 직접 만져보면 나타나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얼굴과 손은 뜨거우나 아랫배와 발은 차갑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의학에서 말하는 ‘상열하한(上熱下寒)’의 상태로, 위는 뜨겁고 아래는 비어 있는 상태이다.

음허화동, 갱년기 불면도 같은 구조다

갱년기에 흔한 불면을 한의학에서는 음허화동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갱년기가 되니 몸이 너무 더워서 잠이 안 온다”고 느낀다. 하지만 한의학적으로 보면 이들이 느끼는 열은 너무 많은 열이 원인이 아니고 부족한 음이 원인이다. 마치 물이 적은 냄비에 불을 켜면 금방 끓어오르는 것과 같다. 속이 비어 있으니 열이 쉽게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럴 때 찬 물을 마시거나 에어컨을 세게 틀면, 처음엔 시원한 것 같아도 전체적인 잠은 질은 오히려 떨어진다. 위의 열은 잠시 식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몸의 바닥은 더 약해지기 때문이다.

덥게 자야 하나 춥게 자야 하나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낀다. 잠은 시원한 환경에서 잘 온다면서 몸은 따뜻하게 해야 한다니 어떤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과 시원한 환경에서 잠을 자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경우가 아니다.
시원한 환경, 즉 잘 때의 공기가 서늘하면 머리와 피부 쪽의 열이 빠르게 식는다. 뇌는 이때 ‘이제 쉬어도 되는 시간’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아랫배와 허리까지 차가워지면 냉기에 민감한 장기인 신장 때문에 몸의 긴장도는 오히려 올라간다. 그래서 몸의 중심이 차가워지면 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잠은 얕아진다.

그래서 공기와 머리는 서늘하게 하기 위해 시원한 수면 환경에서, 배와 허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잠을 청하는 것, 바로 한의학에서 말하는 ‘두한족열(頭寒足熱)’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잠을 청할 수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무작정 식히거나 덥히는 것이 아니라, 열이 있어야 할 곳과 없어야 할 곳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머리는 시원하게, 공기는 서늘하게 유지하되 아랫배와 허리는 따뜻하게 보호해 주는 것. 이 간단한 원칙이 지켜질 때, 몸은 밤을 회복의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잠은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문의 (703)942-8858

<정호윤 예담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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