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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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뮤어 트레일 222마일 <4>

2006-12-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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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질빚은 재보급 일정
체력 한계로 악전고투

8월9일 (수요일)
Purple Lake의 밤은 보름달로 인하여 대낮 같이 밝았다. 오늘은 재보급이 있는 Edison Lake까지 가야 한다. 일정표를 보니 14마일이 조금 더 되었다. Edison Lake의 버밀리온 리조트(Vermilion Resort)로 들어가는 마지막 보트가 오후 4:45어서 새벽 4시부터 서둘렀다. 아침 6:30분에 Virginia Lake에 도착하니 또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가 있을까? 맑고도 깨끗한 물결이 찰랑거리는 호수는 나지막한 산허리를 따라 휘어져 있다.
일정대로 Tully Hole의 계곡으로 내려가서 Silver Pass로 향하던 중 지도를 보니 아무래도 거리가 너무 길다. 자세히 보니 14.4마일이 아니고 17.4마일이었다. 일정표에 3마일이 누락된 것이었다. 오늘같이 촉박한 때 3마일 추가라면 문제가 완연히 틀린다. 나의 실력으로는 하루 15마일이 한계였다. 서로 의지하면서 혹 오늘 안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내일 아침에 들어가기로 약속했으나 모든 물품과 계획을 작성한 임헌성씨는 조급한 모습이었다.
오후가 되어 Silver Pass를 향해 한참 걷는데 바위산 아래로 큰 호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산등성이 고개로 길이 이어져 이제 다 왔다 하고 올라갔는데 그 곳이 끝이 아니었다. 반대편에서 오는 산악인에게 물어보니 지금부터 Edison Lake까지는 조금 힘들다고 한다. 과연 pass의 정점은 다른 호수 3개를 지나 눈 덮인 바위 위로 길이 나 있는 것이었다.
Silver Pass에 도착하니 12시 정오였다. 앞으로는 내리막길이지만 Edison Lake까지 8.7마일을 4시간30분 안에 주파해야 한다. 가벼운 day pack이라면 2마일을 1시간에 갈 수 있지만 40파운드의 배낭을 메고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상황이 급했는지 임헌성씨와 조래복씨가 급하게 내려간다. 그 뒤를 따르려고 힘을 내보지만 물집이 생긴 양발은 잠시 쉬는 동안 다시 부어오른 듯하다. 아무래도 내가 뒤쳐지게 되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폭포 아래로 돌을 깎은 길은 1마일에 거의 1,500피트나 내려가는 급경사였다.
내가 뒤에 쳐지자 앞서 내려 같던 임헌성씨가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올라왔다. 내 배낭을 대신 지고 0.5마일 정도를 내려갔는데 아무래도 오늘 안에 목적지 도착하려는 의지가 가득한 것 같았다. 더 이상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서로 격려하면서 목적지까지 걸음을 내달았다.
오후 4시께 Edison Lake 1.4마일을 남겨놓은 지점에 도착했는데 호수와 가까운 듯 숲속 완만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호수에 도착해 보니 4명의 산행인들이 perry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이제는 오늘 저녁 더운 샤워를 하고 편히 잘 수 있겠구나. 그런데 perry가 고장 나서 작은 보트로 운행이 되니 좀 기다려야 될 것이라고 한다.
약 45분 정도 기다리니 그 넓은 호수 가운데로 조그만 낚시 보트 2대가 사람들을 가득 싣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3명이 간신히 앉는 보트로 탑승하니 운전수가 resort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겪은 고생에 비하면 이 보트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두 어린아이와 같이 즐거운 표정이다.
Vermilion Resort는 규모나 시설로 Red’s Meadow에 훨씬 못 미치는 조그마한 곳이었는데 store 옆에 붙은 조그마한 식당에서 모두들 북적대고 있었다. 보급품을 찾은 후 식당에 앉았는데 한 명뿐인 웨이터는 전혀 서비스를 해줄 형편이 못되었다. 저녁 메뉴로 잘 모르는 음식들이 몇 가지 칠판에 적혀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는 모두들 맛있게 먹고 있다. 꾀죄죄한 몰골에 샤워도 하지 못했지만 배가 고프니 음식부터 주문했다. 임헌성, 조래복씨는 fish & chips를 나는 meat pasta를 주문했다. 이윽고 나온 음식은 배고픈 와중에도 정말 맛이 없었다. 음식과 음료 값은 한 사람 앞에 20달러 정도.
식사 후 캠프장을 찾아 텐트를 칠 생각을 하니 앞이 막막했다. 회계를 맡은 내가 용감하게 점원에게 방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하나 남았다고 한다. 스토어에 딸린 방이 총 4개로 맨 끝 방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샤워와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침대도 3개나 되었다. 방값은 85달러였는데 185달러라도 아깝지 않았다. 내가 방을 빌리자 혹시나 했던 임헌성, 조래복씨도 무척 반긴다. 모두들 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고 그동안 약식으로 했던 냄새 나는 빨래들을 챙겨 공동 세탁기에 넣었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식탁에 둘러앉아 음료수를 한 잔씩 마시면서 어린아이처럼 재잘대며 얘기들을 나눈다. 발전기로 돌아가는 전기는 9시가 되자 끊어지고 Vermilion의 밤은 깊어갔다. 오랜만에 따스한 침대를 차지한 3명의 산행인은 코를 골면서 단잠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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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든 패스를 지나 김영환씨를 만난 일행이 텐트를 치고 회포를 풀고 있다. 왼쪽부터 김영환, 김인호, 조래복씨>

8월10일 (목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임헌성씨가 새 아이디어를 꺼낸다. 내 곰 박스와 필요 없는 물품들을 소포로 돌려보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좀 더 가벼운 자신의 배낭을 쓸 것을 권했다. 모든 물품을 펼쳐놓고 돌려보낼 물건을 골랐다. 촉박한 신행길에는 짐이 가벼워야함을 절실히 느꼈다. 한결 가벼워진 배낭을 보니 마음도 가벼워지는 듯하다.
아침에 호수로 나와 보니 고장 났다던 perry가 운행이 되었다. 약 15명 정도의 산악인들이 호수를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잠시 하이킹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JMT를 횡단하는 산행인들이었다.
Edison Lake의 푸른 물결을 가르면서 건너편에 도착한 후 어제 저녁 그렇게 힘들었던 길을 가볍게 주파하여 Quail Meadow로 들어섰다. 오늘의 장애물은 Selden Pass, 이곳에서 Bishop에서 출발한 김영환씨를 만나기로 했다. 아침나절은 계속해서 올라간다.
그리고 큰 물줄기가 쏟아지는 Bear Creek을 만났다. 어제 저녁 푹 쉬었고, 오늘 김영환씨도 만나고 이틀 후에는 설암 식구들과 만나고 그러면 모든 여정이 끝이 난다. 이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힘이 솟는다. 역시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따른 희망과 성취감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고 다시금 깨닫는다.
다른 팀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하루 종일 걷다가 오후 5시 즈음에 Selden Pass 밑자락에 도착했다. 처음 통과하는 pass는 여러 개의 바위산 가운데 어느 쪽으로 통과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는데 모든 바위산들이 거친 암벽에 두꺼운 눈으로 감싸고 있어 어느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이 없다. 다른 팀은 pass 못 미처 tent를 쳤지만 우리는 날이 어둡더라도 pass를 넘어야 한다. 일정에 그렇게 되어 있고 김영환씨도 그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경사로를 오르게 되면 힘이 들어서인지 동료들과의 대화가 끊어진다. 그리고 각자의 속도대로 걸어 올라간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뒤에서 올라오는 동료를 꼭 확인해야 하지만 며칠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긴 오늘은 각자의 pace 대로 올라간다.
멀리서 보이던 바위산들이 눈앞으로 바싹 다가오자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Selden Pass 밑에 자리 잡고 있는 Marie Lake이었다. 호수 주위로 보이스카웃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텐트를 쳐놓고 저녁준비를 한창하고 있다.
이윽고 pass에 도착하니 김영환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미리 약속한 대로 표지판에 “설암 지나갑니다. 오후 7:30분”이라는 쪽지를 적어놓고 고개를 내려가니 머리에 헤드램프를 빤짝이는 사람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바로 김영환씨였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두들 얼싸안고 기뻐했다. 김영환씨는 오후 4:00에 이곳 pass에 도착했으며 만약 우리를 그때 만났으면 혼자서 계속 맘모스까지 산행한 후 우리더러 pick-up하라고 하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이번에 같이 산행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시간 제약으로 앞뒤 꽁무니만 맛보게 된 김영환씨의 산에 대한 열정에 같이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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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평원에 그림 같이 자리 잡은 버지니아 레이크,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가 또 있을지 계속 감탄하게 된다>

김인호 <설암 산악회 총무>
www.suramalp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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