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가짜

2006-06-26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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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정 <한국학교 교사>

그 아저씨는 내가 살던 아파트 옆 동에 살고 있었다. 엄마 친구의 남편인 그를 알게 된 건 올망졸망한 그의 아이들 때문이었다. 엄마는 자주 그 아이들 주전부리를 내 손에 들려 가져다주게 하셨는데, 그 때마다 그집 안주인은 없고 아이들은 늘 배고파하는데도 아버지라는 사람은 허구한날 심각한 표정으로 바둑만 두고 있었다.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자식이 둘인, 여느 표준 가장과 다르지 않은 그가 남들과 다른건 매일 아침 출근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허우대도 멀쩡하고 소위 일류대학 정치학과를 나왔다는 그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바둑두기였는데, 그가 바둑을 둘 때의 표정 하나는 참으로 일품이었다. 한 수의 바둑알을 옮기기까지의 그 고뇌에 찬 옆얼굴의 실루엣이라니... 그의 그런 분위기는 그당시 여고생이던 나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그 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귀동냥한 바에 의하면, 그는 대학 시절 운동이라나 뭐라나를 너무 열심히 한 탓에 소위 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됐다는 거였다. 그 당시 이념과 사상이라는 것에 무지와 순진을 겸비했던 내가 ‘운동’이라는 말을 그저 체육시간에 하는 육체 단련 정도로 이해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후 그 운동이란 것이 내가 처음 생각한 그 운동이 아니란걸 알게 됐고, 아저씨의 고뇌에 찬 실루엣이 고작 바둑따위 때문만이 아닌 더 심오한 이유가 있음을 깨닫고 난 후론 그의 탱탱 놀고 먹음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암, 그렇지. 지고한 이념과 사상을 가슴에 품고 머리에 담고 사는 사람이 범부와 같이 살 순 없지...


그 후 상상 속의 그의 이미지가 애두벌룬처럼 부풀대로 부풀어오른 어느 날, 그만 그 애두벌룬 어딘가에서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급기야 그것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울고 있었다. 남편의 손지검 자국을 보여주며, 그의 무능에, 주색에, 터무니없는 남성우월주의에, 구구절절 쏟아지는 그의 본색이 차마 듣기 민망했다.
알 수 없는게 사람이라더니… 소외된 자, 약한 자들을 위해 당당히 저항하던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약자인 여자, 아니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의 인격조차도 그토록 무참히 짓밟는 인간이 무슨 놈의 운동씩이나 한단 말인가. 자신의 남성 우월의 기득권은 한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으면서 권세자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라 함은 또한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왔다. 처음부터 누가 믿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 혼자 들입다 상상력을 키워놓곤 제 풀에 꺽인거긴 하지만 그토록 진짜로 믿었던 것의 진면목인 가짜의 모습과 맞닥뜨리는건 여간 실망스러운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가짜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름아닌 내 속에서.
내 안에 있는 그것들을 들여다보는건 더욱 난감한 일이다. 게다가 그 가짜의 질긴 근성은 좀체 도태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아, 슬프도다! 누가 과연 나를 이 가짜의 늪에서 건져낼 수 있을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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