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그러니까 스물 여섯

2006-04-26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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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자영업>

그러니까 조건 없이 나눌 때에 진정 내 것이 되는 것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은 참으로 잘 된 표현인 것 같다. 깊은 웅덩이에 푹 빠지듯이 빠져 버렸으니 주변이나 상황은 전혀 보이지 않고 사람 하나만을 보고는 정신을 잃어버리니까 말이다. 그런 사랑에 빠져서 가난한 왕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재가를 하셔서 따로 살았으니 어디 부모 밑에서 잘 자랐다고 할 수가 있나, 대학도 아직 못 마친 고학생에다가 군대마저 안 갔다 왔으니, 어디 그뿐인가 몸이라도 건장해서 믿고 딸을 맡길 마음이 들만큼 든든하기나 했으면.....
단 한구석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가슴앓이로 반대하시는 부모님과 친척들이 참석하지 않은 단촐한 결혼식을 했다. 그럼에도 우리 둘은 형제들과 친구들의 진심 어린 축복 속에 마냥 행복했다. 언니와 형부가 선물로 보내주는 신혼여행을 위해 비행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때 모든 걸 던진 우리의 미래와 희망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굳게 믿고 출발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만난 사람이 시외할머님이시다. 재가한 딸이 남겨 놓은 어린 외손자를 당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며 키워내신 할머니. 쪼개어 받는 생활비로 서울 변두리의 빈민촌 한 구석에서 왕손처럼 돌보신 할머니. 피안도가 고향이신 할머니는 주먹만한 김치만두를 빚어놓고 첫 외 손부를 맞으시며 말없이 방바닥에만 눈길을 두셨다.
대한민국의 남아로서 꼭 해야할 의무인 군엘 가야 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홀로 남은 나와 시외할머니와의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헤아릴 길 없는 정성과 보살핌이 나를 감동시켜 주셨고, 할머니의 가슴속에 평생동안 묻혀 있던 이야기도 나에게 하나하나 풀려 나오며 두 사람이 하나로 묶여지고 있었다. 시외할머니와 나와의 군대생활 3년이었다. 나와 내 남편이 제일 사랑하는 우리의 할머니는 참 행복의 단맛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의 두 아이들 마저 웬만큼 키워주신 다음에 곱게 가실 길을 가셨다.
사랑은 빠져서 눈이 멀어야 하고 행복은 내가 가진 것을 한없이 그저 나누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렇게 살아오며 배운 셈이다. 세상이 아무리 급변한다해도 우리는 사랑과 행복을 먹고산다. 그 둘은 사실은 이미 내 안에 다 있다. 다만, 조건 없이 나를 나눌 때에 비로소 그 사랑과 행복이 진정한 내 것으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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