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배우며/사랑의 기억들
2006-04-05 (수) 12:00:00
최형란<수필가>
우리집 아침은 매일 한바탕 전쟁을 치르면서 시작되는데, 남편과 아이들의 아침, 점심 도시락, 간식까지 챙기고, 산발한 딸 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는 것으로 나의 임무는 끝이 난다. 자고 일어나 부시시한 딸 아이의 엉킨 머리를 빗길때면 아이는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대는데, 그럴때마다 나는 몇년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 생각이 나곤 한다.
아침마다 매일 내 머리를 빗겨 주고 내 마음에 들때까지 몇번을 곱게 따 주셨던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내 머리를 빗겨 주는것을 좋아했었다. 엄마는 아침에 바쁘기도 했고, 엄마가 나의 엉킨 머리를 빗겨 줄때면 가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픈 적도 있었지만, 할머니가 빗겨 줄때는 신기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나는 딸 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나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아플까봐 마음 쓰셨던 그 분의 나에 대한 세심한 사랑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초가을이 지나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할때 쯤이면, 털실로 밤 늦도록 뜨게질을 하던 엄마. 한달 후면 네게 입혀야지 하면서 뜨게질을 하는 중간 중간 내 몸 여기 저기에 길이를 대보곤 했고, 겨울이면 조끼, 스웨터, 멋진 망또, 목도리, 장갑, 모자를 떠 입혀서 학교에 보내면, 그 날, 나는 늘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었다.
이런 털실 옷 말고 예쁜 옷 사달라고 내가 징징대면서 부터였는지, 언제 부터였는지, 엄마는 더 이상 우리 형제들의 옷을 뜨지 않았지만, 엄마의 나에 대한 사랑은 나의 유년시절, 그 가볍고 따뜻했던 겨울 털실옷의 기억으로 그렇게 남아있다. 나를 귀여워해주며, 학교에서 길에서 만나면 가진건 돈 밖에 없다며 늘 밥을 사주던 사람 좋던 고향 선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친구를 통해 들었던 몇달 전, 작은 추억이라도 함께 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마음 아픈 것 임을 알게 되었다. 나를 짝사랑하는 친구한테 소개시켜주는 댓가로, 쌀 한 가마 값을 받고 나를 팔아 넘겼다 해서 내가 한때 분개를 한 적이 있었지만, 언젠가 우연히라도 한번 만나면, 그때 밥 많이 사줘서 참 고마웠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당신한테 미안했어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한테 마음을 다쳐서 당신을 오래 미워했어요 그래서 그때 차갑게 굴었어요, 당신한테 늘 고마워요, 이제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미안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살아간다는 것은 이래서 쓸쓸한 것일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때는 되돌리기에 언제나 한 발 늦고, 예기치 않은 이별로 인해 언젠가는 말 하고 싶었지만, 오래도록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은 끝내 하지 못한채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 보낸후 그리움만 안고 살아 가고, 뒤늦은 후회로 가슴을 치다가, 또 금세 잊고 일상에 묻혀 허둥대고, 막차를 놓치고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 하고, 다시 미안해하고, 잊혀지고…
이 세상을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을 이어주는 끈은 바로 ‘사랑했던 기억’이라고 한다. 떠나간 사람도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기에 늘 지켜보고 있고, 남겨진 사람도 떠난 사람과의 사랑했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다정하고 따뜻한 교감, 사랑이고, 우리에게는 결국 ‘얼마나 사랑했는가’ 만이 남겨진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 만 가니 눈물이 나네…사랑은 남겨 놓고 사람만 떠나가서, 그래서 눈물이 난다는 용필 오빠 노래가다 맞다는 것을 깨달은 다시 꽃피는 올 봄, 나는 안 그럴줄 알았는데, 왠지 자꾸 오래 살고 싶어진다. 오래도록 이 세상에 남아 많이 사랑하며 살고 싶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