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남준선생을 기억하며
2006-02-11 (토) 12:00:00
최대식(한국산업대 교수)
내가 만난 백남준 선생은 1978년에서 1980년, 꼭 3년 정도가 아닌가 싶다. 맨 처음 만날 때 나
의 친구인 무용가 이선옥 박사와 같이 가서 서로 인사하고 지난 것 같다.
그 때 당시 이선옥 선생은 NYU에서 선무용 박사과정을 하고 있을 때 백남준 선생이 그의 무
용을 촬영하고 편집하여 TV 비디오 작품을 제작할 당시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옆집 가듯이
가서 선생의 손장난 한 것들을 도와주곤 하면서 선생과 많은 대화를 나눈 생각이 난다.
특히 선생은 늘 언제 잠을 자는지 모를 정도로 생각하고, 그리고 붙이고 떼고, 조으고 하며 처
음부터 끝까지 선생의 손이 지나가야 했다.
당시는 누구든지 전화 없이 드나들면서 선생을 도와주었고 정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선생은 꼭
마무리 작업만큼은 늘 혼자서 하였고 중얼중얼거리며 왔다갔다 하면서 대화의 끝마무리는 초점
없이 흘려듣는 사람으로 본인의 말을 생각하게끔 하였다.
누구든지 미국식으로 친구관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생각이 난다. 또 늘 젊은 작가들이 오면
용기를 주는 말을 해주곤 하였다. 음식은 늘 간단했고 복잡한 것은 싫어하였다.
그러던 중 부인이 오면 부담없이 찾아가는 집이 냉골이 되었다. 그것은 언어 차이도 있었고 무
언지 정감이 가지 않았다. 당시 뉴욕문화원장으로 있던 박영길 원장(작고)이 선생의 작업들을
한국에 가지고 가자고 수차례 건의했는데 부인의 반대로 모두 일본으로 간 것으로 안다.
그러면서 선생의 문은 점점 무거워지고 찾아가려면 절차가 복잡하였고 특히 여자가 가면 부인
이 무척 싫어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은 모든 열정을 작업에만 전념하여서인지 부부관계는
별로 화목하게 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또 몇년 전 전시회를 할 때 작품들을 보면 향수에 젖어 이라랑, 고향, 어머니 등 동요 가사들이
주제가 되어 베다에 색이 없이 흰 캔버스에 청색, 적색 등의 원색으로 드로잉 돼 선생의 삶이
향수에 많이 젖어 있었다고 볼 수가 있었다. 그만큼 선생은 고독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많이
하였다.
그렇게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현대미술의 첨단을 발표했던 전위예술과 퍼포먼스, 비디오작가
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한국의 큰 별이 떨어졌구나 하면서 백남준 선생 또
한 생의 종착역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생을 마감하니 그도 보통사람과 다름없이 화장하고 꽃다발이 둘러싼 관 속에 누워있는 모습이
었다.
적어도 백남준 선생은 운명이 어디서 끝날 것이다 라는 정도를 알아 죽을 때까지 본인의 죽음
을 보여주는 대작의 퍼포먼스가 되어 TV로 전세계에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사망 당시 모든 곳에 비디오를 장치하여 모든 육신을 온세계에 도네이션 하여 장기이식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이식수술을 하는 행위를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되었으면 자식도 없는 육체가 다시 재생하여 눈 먼 사람, 심장 약한 사람 등의 모
든 사람들이 선생의 육신을 받아 영원히 기억에 남는 살아있는 퍼포먼스가 되었으면 그동안 선
생이 이룩해온 예술세계가 진정한 예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