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그러니까 열 둘

2006-01-18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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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주부>

그러니까. 마음 비우기에 달렸다.
황량해 보이는 겨울의 들판이 사실은 참으로 아름답다. 풍성하게 차 있던 가을과는 달리 텅 비어 있어서 편안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뭇잎마저 다 떨군 과실수들은 가지치기마저 끝낸 홀가분한 모습으로 안개 속에 묵상하듯이 서 있고, 시커멓게 거름흙을 덥고 누워있는 넓은 땅도 깊은 휴식에 잠겨 있다. 봄을 준비하며 조용히 속살을 찌우고 있다.
겨울엔 하늘도 저 멀리 낮게 내려앉는다. 빈 들판의 끝자락에 이마를 맞대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겨울 들판에 혼자 서면 커다란 원형 자연관에 말없이 들어선 느낌이다. 사방에 여유가 충만하고 맑은 기운이 온 몸을 감싼다. 욕심이 사라진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크게 심호흡을 한다. 찬 기운이 자신을 가득 채운다.
셀 수 없이 긴 기차가 하늘과 땅 사이를 지나간다. 소리도 못 지르고 지나간다. 아이가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주-욱 그어놓은 하나의 긴 밤색 줄 같다. 기차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기차가 아니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기만 하면 쇳덩어리도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로 바뀔 수가 있다. 내가 알고 있던 길고 크다는 의미도 자연 속에서는 별 것이 못된다.

밭과 밭 사이에 난 길을 따라 해묵은 나무 전봇대가 줄지어 서 있다. 짧아져 가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전봇대가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 길을 따라 끝까지 달려가면 내가 자란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나 둘 전봇대가 스쳐 사라지듯이 묵혀 온 내 잘못도 털어 내버렸으면 좋겠다. 아닌 척 하면서 잔뜩 숨기고 살아 온 내 마음속의 미움들이 이젠 너무 무겁다.
겨울의 밤은 유난히도 길고 깜깜하다. 그래서인지 새벽 뜰에 내려앉는 하얀 달빛이 말할 수 없이 교교하다. 차고 부드러운 빛을 천지사방에 비추며 묵묵히 긴 밤을 밝힌다. 자랑하지 않는 그 은은함이 사람의 속마음을 다 드러내게 만든다. 얼마나 인색하고 팍팍한 삶을 살아 왔는지 스스로 고백하고 싶도록 만든다.
겨울이 이렇게 자연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훌훌 털고 가볍고 편하게 살라 한다. 화해의 봄으로 가는 길목이 나의 마음 비우기에 달렸다. 텅 빈 아름다운 겨울 들판에 서서 비워내기의 아름다운 법칙을 배운다.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먄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지겠지. 희망이 있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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