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그러니까 넷
2005-11-23 (수) 12:00:00
김정옥<주부>
그러니까. 묵은 장맛.
추수를 다 끝낸 텅 빈 농장의 들판을 달리다 보면 마음을 잡아당기는 하나의 걸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농장 입구에 서 있는 주인의 집으로 보이는 본체와 조금 떨어진 뒤쪽으로 다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시커멓게 서있는 커다란 목조건물. 농장의 창고 겸 가축 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라 고나 할까. 얼마나 오래 됐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지붕으로 얹었던 널빤지는 다 낡고 헐어서 하늘도 마음 데로 보인다. 골조로 세웠던 기둥마저 꺾여 있어서 기우뚱 허리가 휜 모습이 금방이라도 푹 쓰러질 것만 같다.
그 옛날, 사람들이 이 건물을 짓던 날은 아마도 크나큰 잔치 날 같았을 것이다. 엄청난 재목들이 들어오고 인부들 또한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 같은 장비도 없었을 테니 재목이 엮이고 사람이 엮였을 수밖에. 건물이 하늘에 닿아 갈수록 아이들의 함성뿐만 아니라 손 품을 합쳤던 모든 일꾼들의 가슴속도 감격으로 벅차 올랐으리라. 긴치마를 펄럭이며 저녁상을 차리는 여자들에게 자기의 일 인양 자랑을 늘어놓았을 남자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저리 높고 저리 넓은 큰 건물을 지어놓은 주인은 또 얼마나 흡족했을까. 건초를 쌓아놓고 말들을 들여놓은 후 넉넉한 감사의 잔치를 베풀었으리라.
농장의 부의 상징과 같았던 창고가 이제 낡고 허름한 모습으로 제 몫을 잃은 체 물러나 있다. 시스템이 바뀌고 운영방법이 개발되어 소용이 없어진 저 낡은 건물을 헐어 버리지 않고 저렇게 세워 두는 마음이 아름답고 여유 있게 느껴진다. 아마도 이곳에서 자라 멀리 떠나 살고있는 자녀들의 고향을 잃지 않게 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자신들의 젊음과 꿈의 세월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넓은 농장이 정답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저 집이 그 자리에 서있기 때문이다. 창고 안에 쌓여있는 묵은 이야기들이 피어오르는 것인가. 봄이 되면 널빤지 앞으로 노란 수선화가 핀다. 낡은 목조 건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더욱 화려하고 아름답게 돋보인다.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