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흰 도화지에 색칠하듯이

2004-07-22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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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경<국제회의 통역사>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들었다. 이라크의 한 젊은이가 아테네 올림픽에서 자기 나라를 대표해 최선을 다해 싸워 권투에서 금메달을 필히 따내고야 말겠다고 말했다. 또한 74세의 고령에도 자기가 아니면 아픈 아이들이 그나마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가족들의 만류도 무릅쓰고 집을 떠나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위험 속에서 진료소로 향하는 바그다드의 소아과 의사의 이야기를 잡지에서 읽었다. 테러범들이나 사담 후세인과 같은 악독한 독재자와 그의 후손들만이 우글거리는 이라크가 아닌 이라크를 만난 것이다. 이라크인들에 대한 나의 무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어느 누구를 만나던 그 만남이 첫 만남이라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고 색도 칠해져 있지 않은 흰 도화지를 대하듯이 만나자고, 아무런 선입견도 갖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살아 왔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나 데이트하다가 자연스럽게 결혼하는 것이 아닌, 순전히 결혼이 유일한 목적인 중매를 탐탁치 않게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매란 그 자체가 타인들에 의해 이미 그림이 그려지고 색이 칠해진 도화지의 교환에 다름 없기 때문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나름대로 즐기는 이유도 나름대로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교회 착실히 다니고 신앙심이 돈독하니까, 명문대를 나왔으니까, 경상도 남자니까, 전라도 사람이라서, 양반집 자손이니까, 가난하게 애비 없이 자랐으니까, 그래도 배운 사람인데, 이혼 했으니까, 동성연애자라서.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분류하는 행위 그 자체야말로 도화지의 대부분을 지울 수도 없이 진하게 이미 색칠해버려 한 개인을 진정으로 알고 이해할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911 사태 후에 언론이, 뉴스가, 민심이 이미 색칠해버린 도화지때문에 얼마나 많은 중동 사람들이 인권을 박탈당했는가.

이처럼 멋대로 사람들을 분류해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으레 이럴 것이다, 그래서 알 필요도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도화지의 한 부분도 남김없이 전부 칠해 버리는 경우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허다하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흰 도화지를 꺼내 자기가 보고 느낀 대로 색칠하는 작업을 잊지 말자. 아울러 우리는 자신의 보고 느낀 바 역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습득해 온 선입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면서 항상 스스로를 겸허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지난 해 4월 102세로 타계한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도 그의 저서 진리와 방법에서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이해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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