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휴식

2004-07-13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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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수<화가>

매드린, 로나, 소피아, 애나, 그리고 에드워드 이 다섯분을 부모처럼 모시고 살때였다. 작은 양로원에서는 일보다 책임감의 비중이 더 컸다. 그래서 좀처럼 여행의 기회가 없던 우리 부부가 오랜만에 3박4일간의 휴가를 가질수가 있었다. 60년 살아온 나의 길고 긴 삶을 기념한다고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아직 바다의 철이 되지 않은 4월인데도 나는 멕시코 서해 연안의 아카풀코(Acapulco)를 택했다. 조용한 휴양지 아름다운 바다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마음껏 자연속에 녹아들고 싶었다. 그림을 생각하고 싶었다. 시집을 읽고도 싶었다.
훼닉스(Phoenix)에서 비행기를 바꿔 탄다고했다. 착륙을 준비하는 방송소리를 들어면서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본것들, 사람들의 흔적들, 어느 한 곳 가만둔 곳이 없다. 산이고 들이고 마구 잘라내어 길을 만든 것이 마치 수술한 흔적 같다. 찰싹 달라붙은 조개 껍질 같은 집들이 그렇고, 반듯하게 규격지어진 논 밭이 그렇다. 달리는 자동차도, 멈추어선 자동차도, 건물들도 모두가 조그만 장난감 같다. 비행기의 고도가 아직도 높은 탓인지 모두가 회색 빛이다.

멕시코의 아카풀코 비행장에는 시골 냄새가 났다. 나무냄새, 흙냄새, 공기의 오존 냄새, 아무튼 샌프란시스코의 냄새와는 달랐다. 세멘트로 덮여진 회색빛 보도가 아닌 황갈색 흙을 밟고 선 나는 마음이 설레였다.
미국의 중동부에는 바다 같은 호수가 참 많드니 이곳은 호수 같은 바다다. 태평양의 거센 파도도 한풀꺾여 만(bay)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넓은 모래밭에 살짝 살짝 너울거린다. 4월의 바다는 조용하고 한가해서 더 푸르고 더 맑았다. 긴장에서 풀려난 남편은 기분좋게 오수를 즐기고. 나는 베란다에 앉아서 열심히 바다를 내다 보았다. 고향 바다를 생각하며, 추억을 되새기며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바다를 보며 이른 아침을 먹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셨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위를 걸어며 조병화시인의 ‘추억’을 읊었다.

잊어버리자고
바다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가고
가을가고

고향을 다녀 온 것 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좋은 꿈을 꾸고 깨어난 아침처럼 상쾌하게 돌아와서 고달픈 이민생활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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