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약속
2004-06-30 (수) 12:00:00
최재명<엔지니어>
아빠, 내일 꼭 사줘야 해!
그래, 알았어.
약속?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약속이야!
막내 아이가 전부터 계속 아이들 만화 프로그램에 나오는 ‘유기오 카드’를 사달라고 조르기에 무심결에 알았다고 했더니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까지 찍으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꼭 사줘야한다고 내게 얼음장을 놓는다.
살아가면서 주변을 돌아보면 이렇게 너무 쉽게 약속을 해버리고 또 너무 쉽게 그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해버리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흘려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약속의 연속이며 수많은 약속들이 얽히어 있는 그 속에서 하나 하나 실타래를 풀어가듯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은 아닐는지.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많은 약속들이 있기에 또한 거짓말도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이겠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약속중의 하나가 아마도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모르던 선남선녀가 만나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귀밑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평생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겠다고 많은 친지와 친구들 앞에서 그 약속을 하는 것이 결혼이니 말이다. 때문에 그렇게 고결하고 숭엄하게 예식을 치르는 것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다. 하얀 드레스에 면사포를 쓰고 손에 부케를 들고있는 천상의 신부와 까만 정장에 머리엔 한껏 힘을 주고 있는 신랑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은 모든 가정에 가면 그래서 소중히 간직하며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놓는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3년, 5년, 10년이 지나면서 그 때의 약속은 점점 잊어버리고 서로의 잘못만 보면서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하다 급기야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언한 약속을 소리소문 없이 버려버린다. 기만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약속을 버릴 때에도 약속을 했을 때처럼 그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사정이 이러이러해서 취소하게 되었습니다하고 양해의 말을 구해야한다. 왜냐하면 결혼은 두 남녀 당사자만의 약속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잘 살겠으니 오셔서 축복해 주십시오 하는 당사자와 참석한 사람들과의 약속도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가끔 황혼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같이 산책하는 다정한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반평생이 넘는 시간동안 그 약속을 소중히 지켜나가고 있는 그 모습에 과연 나도 그렇게 우리의 약속을 오래 오래 잘 지켜나갈 수 있을까하고 다시 한번 돌아 보게된다. 이제 귀밑에 파뿌리가 하나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백발이 다 된 나이에 처음의 그 약속이 지켜진 것을 확인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어색한 듯한 자세의 결혼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머리에 힘도 한번 주고 잠시 무감각해져가던 그 약속을 돌이켜보며 내 옆에 누워있는 아내의 눈가에 사진에선 안보이던 잔주름이 생긴 것을 보면서 내 자신을 탓하고, 매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약속을 어긴 것을 반성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나저나 머리에 무스도 중요하지만 막내아이와의 약속으로 새끼손가락이 부르트고 엄지손가락 지문이 다 닳아지는 일이 없도록 이번 토요일에는 꼭 ‘유기오 카드’인지 ‘육이오 카드’인지 구입을 해놓아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