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강은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소

2004-04-20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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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은 많은 여행자들로 가득 찼는데도 조용하기만 하다. 태극 마크가 달린 정장의 승무원만이 분주히 통로를 오간다. 맑고 부드러운 미소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뢰감마저 갖게 한다. 참 아름답고 신선하다. 예전에 가졌던 불안감을 말끔히 씻어준다.
이번 고국방문은 의외로 의미가 있다.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묘 대신에 화장하여 산에 뿌린다. 40년만에 8형제가 함께 모인다. 고국에서는 1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고 개인적으로는 너무 고국이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그리고 주저주저했던 출판도 기획하면서.
비행기는 낯선 영종도 하늘을 날고 있었다. 멀리 뵈는 관제탑. 반짝이는 비행기들이 넓은 대지 위에 줄 서있다. 바다와 강이 있는 반듯한 만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비행장 출구는 넓고 반들반들한 대리석으로 위로는 전광판이 빠른 속도로 안내문을 전하고 있다. 엄청난 시설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가 신기하도록 변해 있다. 이들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신뢰감이 눈에 띈다. 지난날 방문 때보다 이것이 더욱 눈길을 끈다.
주말이 가까워서인지 도로는 여유 있게 넓고 길은 재빠르게 서울로 접어든다. 울창한 아파트 단지들이 도시의 시녀처럼 도로변에 줄줄이 섰다.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내가 살던 반포아파트는 복잡하게 들어선 백화점과 점포들 외에는 옛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변의 새벽은 빨리 온다. 여명이 고층아파트 사이로 밝아온다. 강변 아침 산책길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다. 3km만 달리면 한강교다. 다리 옆에는 이를 지키려다 숨진 이들의 추념비가 서있다. 돌담들 사이로 철쭉꽃이 곱다. 조금만 더 오르면 49명의 학도병 현충비가 있다. 알려진 이름마저 비바람에 씻기어가고 있다. 18세, 19세 어린 청년들이 포항전투에서 무참히 스러져간 것이다.
저 아래 강에서는 수영복 없이 헤엄을 치던 때가 있었다. 사촌형이 익사한 곳이기도 하다. 흰 모래사장을 잃은 한강은 잔물결을 지우면서 예나 다름없이 다리 밑을 유유히 흘러간다.
듣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시끄러운 선거 유세나 방송을 볼 수 없다. 탄핵으로 인한 대통령의 집무정지도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 않다. 거리에는 인파가 밀려가지만 질서가 정연하다. 낮에는 분주한 버스와 전철이 편안히 사람을 실어 나른다. 백화점과 시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번잡하다. 물론 상거래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부모님의 묘지는 아파트 단지가 가까이 코를 디밀고, 언덕길은 가파르고, 잔디는 메말라 있었다. 상당한 시간을 걸려서 유골을 채취하고, 수원에서 화장을 하고, 곤지암에서 재를 뿌렸다. 이제 마음 홀가분하다.
한국 영화예술의 이정표 같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감상하며 영화가 일러주고 싶은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형제사랑이 사상의 갈등을 넘어서려는 애절한 투쟁으로 승화되는 사연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부역자나 부역자의 누명을 쓴 사람들이 참살 당하는 비극의 역사를 눈물로 바라본다.
반세기 역사가 지나고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조국은 이제까지 이룬 기적적인 업적을 끊임없이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사상에 앞서 사람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자유스럽게 삶을 구가하며, 비폭력적인 협력과 자비가 베풀어지는 삶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투표와 개표 결과를 주시하면서 피부로 느껴오는 감동은 희망적이다. 일주일간의 피상적인 경험과 관찰은 모자라기 이를 데 없지만 내가 살던 강은 어쩌면 더욱 큰 기적을 가져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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