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남긴 교훈
2004-04-15 (목) 12:00:00
<미주본사 주필>
병아리기자 시절 육군본부를 출입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참모총장(당시 서종철 대장) 비서실에 낯선 대령 한 명이 보좌관으로 부임해 왔는데 위세가 당당해 보였다.
“저 사람 누구요?”하고 부관에게 물었더니 “아니 육군본부 출입기자가 저분을 모르십니까? 그 유명한 전두환 대령입니다. 군인중의 군인이죠”라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군인중의 군인이라… 기자실로 돌아와 “누가 새로 부임한 전두환 대령 아는 사람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모른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그는 공수특전단에 있었기 때문에 기자들과의 접촉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젊은 장교들에게 물어보면 하나 같이 전두환을 칭찬했다.
육사 정규 1기생인 그는 후배들의 우상이었다. 사심 없고, 부하 사랑하고, 지휘능력 뛰어나고, 박력 있는 사나이로 인정받고 있었다. 누구나 그가 한번은 참모총장을 할 것으로 내다 봤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 았다.
요즘 전두환씨가 겪는 수모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이 대통령만 하지 않았더라면 저런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왕년의 육사생들의 우상이 지금은 육사생들의 수치로 등장했다. 군인은 별 네개 달았으면 더 없는 가문의 영광이고 사회에 나와 큰 기업체 회장 하는 것도 우습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도 보기에 추하다. 군인 세계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별세계며 그 울타리 안에서 출세하고 존경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무엇보다 군인은 깨끗하고 남자다운 데가 있어야 존경받는 것이고 잔머리 굴리거나 돈에 눈이 먼 태도를 보이면 망신당하기 안성맞춤이다.
전두환씨가 지금 당하고 있는 수모는 자업자득의 성격이 짙다. 대통령직을 수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역사를 내다보지 못했고, 대통령을 그만두고 물러난 후에도 국정 자문역을 맡을 수 있으리라고 자만했고, 친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해 정권을 물려주면 안전장치가 완전할 것으로 착각했고, 청와대 시절 받아 챙긴 돈을 분산하면 관리가 가능할 줄 알았다. 더구나 지난해 재산 조사 때에는 자신의 현찰 재산이 29만1,000원이 든 저금통장 하나뿐이라고 우기면 통할 줄 알았다. 군인시절 순발력 있고 판단 정확하기로 이름났던 그가 사회에 나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에서는 모두 오판한 셈이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망신을 이젠 가래로도 막기 힘들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처신이 국민들의 눈에 우스꽝스럽게 비치고 있는데도 계속 그는 악수를 두고 있다. 지난해 재산 경매 때 주인 잃은 진돗개 두 마리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식구나 마찬가지인 애견을 어떻게 경매에 내놓을 수 있을까.
전두환씨가 숨겨놓은 비자금 100억원이 또 발견되었다고 엊그제 신문에 보도되었다. 만약 사실로 밝혀지는 날엔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결혼 축의금 16억원을 외조부가 167억원으로 늘려주었다고 아들이 코미디적인 법정 증언을 한지 3일만에 또 터진 셈이다. ‘전두환 망신 시리즈’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다.
사람은 원칙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것, 분수에 넘치는 지위를 무리하게 유지하면 비극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전두환씨의 케이스가 실감나게 말해주고 있다. “육사생들이여,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되지 말라.” 그가 후배들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