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희극과 비극

2004-03-15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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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김<회사원>

어릴 적, 온 가족이 모여서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영화를 텔레비젼으로 본 기억이 난다. 큰 배가 조난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영화인데 각종 특수 효과며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나 진지했었다. 결국 주인공인 목사가, 신에게 처절하게 절규하면서 안간힘을 쓰고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고 불타는 배의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옆에게 그 장면을 보던 엄마랑 아빠가 바로 저 연기 때문에 오스카상을 탄 거라며 감동으로 고개를 끄떡거리는 데, 영문을 모르는 내 한마디에 두 분이 배꼽을 잡고 말았다. ‘저 아저씨는 죽었는데 어떻게 상을 타?’ 그 후 철이 든 후에 이 영화를 TV에서 한 번 더 했었다. 그 때도 주인공이 죽을 때는 그게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서늘하고 막막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괸객이 연극, 영화 또는 TV 드라마에 빨려들어가면 재미 있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그럴 듯한 허구일 뿐이라는 걸 이제는 다 아는 어른이 되어도,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현실과 극속의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악역을 맡은 배우들을 무조건 미워해서 욕설이나 달걀 등을 던지는 등의 해프닝이 뉴스거리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가 끝나고, 숙제나 설겆이가 밀려있는 현실로 돌아왔어도 자꾸 여운이 남아 현실의 일을 집중하기 어려운 경험도 꽤 있다. 그런데 대부분 여운이 남은 것은 비극인 경우가 많다. 물론 비극인지 희극인지 구별이 어려운 것도 많고, 다른 방식으로 여운을 남기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희극과 비극이라는 구별만 놓고 볼 때 비극의 여운이 오랫동안 남는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인터넷의 위력이 막강해서 인기 드라마가 비극으로 끝난다는 소문이 나면, 해피엔딩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고, 가끔 그래서 결말이 바뀌기도 한다고 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이유 중에서 꼭 들어가는 것이 ‘현실이 이렇게 어두운데 드라마라도 행복한 결말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허구지만 진짜 못지 않게 애착을 가졌던 드라마에서 빠져나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드디어 다들 행복해 지고 사랑을 이루었다. 나도 잘 될 것 같다는 비현실적(?)인 낙관론자가 된다. 만약 비극으로 끝난다면, 그 동안 드라마에 몰입했던 정도에 비례하여 황량해진 가슴 때문에 현실 속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어찌하나, 저 가련하고 안타까운 연인들을, 어찌하나 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상을’. 하지만 그 막막한 슬픔이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로 바뀌면서, 우리를 오히려 현실 속에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막아야 하고, 노력해아 하고, 변화해야 하는 동기 부여를 할 힘을 뿜어 내는 것 같다. 희극은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거려 무대 위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리지만 비극은 무겁고 검은 망토자락을 무대 밖까지 질질 끌고 나온다고 비유하면 어떨지.

나는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기 전부터 왜 예수님의 비극적인 죽음이 영광스런 부활보다 오히려 더, 성서에서 그토록 많이 서술되었는 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지금 비극의 역할을 정리해보니 비극이여야만 우리를 정화(해당되는 한자를 넣어 주세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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