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암소의 설움

2004-01-09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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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큼 어디서 태어나느냐가 팔자를 좌우하는 동물도 없다. 힌두교에서는 소를 대지의 상징이자 만물의 어머니로 여긴다. 힌두 교도들은 전설의 소 카카데누에는 3억3,000만 명의 힌두교 신들이 깃들어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인도 소는 성자 취급을 받으며 평생 놀고 먹으며 도살당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까지 다른 나라 소들은 사정이 달랐다. 평생 밭 갈고 온갖 노동에 시달리다 끝내는 몸까지 식량으로 내놓아야 했다.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순순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모습은 실로 성자를 연상케 한다.
반면 축산업이 대량 생산 체제에 들어간 미국 소는 어려서부터 축사에서 쇠고기로 팔릴 때까지 먹기만 하면서 일생을 보낸다. 소 중에서도 수소는 먹기만 하면 되지만 암소는 젖을 짜낸 뒤 도살된다. 얼핏 보기에는 부드럽고 맛있을 것 같지만 그 때문에 영양분이 다 빠져 암소 고기는 실제로 최하로 취급된다. 미국 쇠고기 등급 중 최고인 ‘프라임’ ‘초이스’ ‘실렉트’는 모두 수소 고기고 암소 고기에는 등급이 붙어 있지 않다.
평생 젖을 짜주고 죽어서도 천대받는 암소에게는 또 하나의 설움이 있다. ‘광우병’(mad cow disease)으로 불리는 BSE라는 질병이 그것이다. 소의 뇌와 신경 조직을 파괴하는 이 병은 무슨 까닭인지 암소만 걸린다. 병 이름에 ‘cow’가 들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병이 한번 발견되면 인근에 사는 암소들은 모두 애꿎은 죽음을 당해야 한다.
미국에서 사상 처음 이 병을 가진 암소가 한 마리 발견됐다. 이로 인해 수많은 소들이 도살당하고 미 전역이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병에 걸려 죽은 미국인은 한 명도 없다. 병 치고는 정말 걸리기 어려운 게 이 병이라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보통 사람이 이 병에 걸릴 확률은 수퍼로토에 당첨된 날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작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 식당 가, 특히 한인타운 갈비 집에는 손님이 확 줄어 울상을 짓고 있다. 한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나던 갈비 집들이 요즘은 개점 휴업 상태다. 건강 상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로 치고 광우병 때문에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다.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 사고로 죽을 확률은 광우병으로 죽을 확률보다 수만 배, 수십 만 배나 높다. 그럼에도 사고가 무서워 차를 타지 않겠다는 사람은 없다.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에 무한한 것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크기다. 그런데 나는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자기 몸을 아끼고 건강에 신경 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는 합리적인 근거에 바탕을 둬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민경훈 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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