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2004-01-06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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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영창 <워싱턴 통합한인학교 이사>

‘역사의 민주화’를 거론함에 있어 한인타운 보통사람들의 ‘이민 삶’을 빼 놓을 순 없을 것 같다. 미주 한인사의 한 부분인 워싱턴 한인사(1883 -1993)도 한인사회의 주도세력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보통사람들이 한인타운의 주역이고 한인역사의 주인공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 말없는 다수의 역사를 찾아주는 것이 한인사의 주요한 사명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인다.
보통사람들의 얘기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민 보따리를 푼 후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낮선 땅 얼굴 선 워싱턴에서 살아 남겠다고 동분서주하던 지난 30여 년의 일상이 바로 우리들의 발자취고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한인 역사다. 70년대 초에는 비행장에 마중 나오는 사람의 직업이 새로 이민 오는 사람의 직업이 되고 그 사람의 주소가 미국주소가 된다는 말이 널리 퍼졌었다. 마중 나온 사람이 목사였다면 그 목사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프린스 조지스에 자리했던 한인촌 켄트 빌리지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1973-75년 사이에 주로 월남에서 일했던 기술자 200여명이 모여 살았고 이들은 켄트 친목회를 만들어 상부상조의 기틀을 다져 갔으며 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한국문화 전수에도 힘썼다.
이 시기 한인들의 실수담은 한둘이 아니다. 어떤 이는 워싱턴을 향해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워싱턴이 뉴욕 바로 옆에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뉴욕행 비행기를 탄 후 비행장에서 내려 운전사에게 매릴랜드 주소를 주고 택시를 탔다가 당시 자신의 전재산인 600 달러를 털린 경우도 있었고 워싱턴의 덜레스공항으로 와야할 가족들이 택사스의 달라스에 내려 그곳까지 가서 다시 워싱턴에 데려온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볼티모어의 한 선박회사에 취직한 후 시간당 얼마씩의 돈을 받는다는데 흥미를 느껴 72시간을 계속해서 일해 고용주를 놀라게도 했으며 그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집에 전화도 놓지 않아 한동안 주위로부터 돈 사람 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한다.
세븐일레븐 편의점은 초창기 한인 이민자들에게는 인기 직장이었다. 간단한 영어를 배울 수 있고 미국을 익힐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민 학교로 불리기도 했다. 이민 온 한인들에게는 언어, 문화충격 또한 무시 못할 일 이어서 이민 온 후 정신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보통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유념해야할 그룹이 있으니 다름 아닌 한인 여성들에 대해서다. 특히 1세 여성들이 그들의 가정과 이를 통한 한인 사회의 발전을 위한 수고와 노력에 비해 그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은 상태에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숫자로 보아도 다수이고 학력이나 사회 공헌도에도 뒤지지 않는데도 그러하다.
한인으로서 현재 연방정부의 최고위직에 오른 전신애 노동부 여성국장을 선두로 2세들을 보면 언론계에선 미 주간지 중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피플 지의 편집장인 박진이 씨가 있고, 법조계, 예술계 등 전문직 분야에서도 여성파워가 이미 남성을 압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한인사회의 저력이요 조타수라 할 한인 여성들에 대한 합당한 인식과 이들의 분발이 한인사회의 앞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한인사회의 잠재력이자 말없는 다수인 보통사람들을 재평가하고 제대로 된 한인역사를 쓰기 위해선 역사의 민주화, 아래로부터의 역사 쓰기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통사람들이 겪어온 곡절 많은 이민생활의 야사를 구술사(생애사)라는 방법론을 통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인 이민 100주년의 한해가 지나갔다. 과거 100년을 정리하고 향후 100년을 내다본다는 것이 100주년 기념사업의 목표였다. 과거 정리가 유명인사 위주가 됐지 않나 하는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다수인 보통사람들의 생활사가 소홀히 됐다면 반쪽정리에 머물 것이다. 필자는 보통한인들의 삶의 재조명을 통해 한인들의 역사적 진실에 좀더 가까이 갈 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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