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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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목조르기 시작됐다"

2002-03-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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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멘터리21-탈북자와 부시의 대북정책

▶ 민경훈 편집위원

탈북자 25명의 극적인 망명을 계기로 북한이 다시 주요 뉴스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탈북자의 집단 행동은 인물 선정에서 언론 플레이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이고도 치밀하게 이뤄져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장기 시나리오의 한 고리라는 추측을 낳고 있다. 탈북자와 북한의 인권,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의 연결 고리를 짚어본다.

이번 주 들어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미 고위 관리는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를 몰래 제조하고 있지 않다고 확인하기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으며 같은 날 조지 테넷 중앙 정보부(CIA) 국장은 "북한이 곧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인 국방 정보부(DIA)의 토마스 윌슨 정보국장은 북한 미사일 동향이 최우선 관심사라고 밝혔고 칼 포드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의 생화학 무기가 주변국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두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들이 이처럼 일제히 북한에 대해 포문을 연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는 부시가 연두교서에서 ‘악의 축’ 발언을 한 이래 얼어붙어 있는 상태다. 겉으로는 북한이 "부시 같은 인물과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 치고 있지만 실제로 북한을 대화 상대에서 제쳐놓은 것은 미국이란 생각이 든다.
말로는 대화창구를 열어 놓고 있다고 하면서 수시로 북한에 대한 비난을 가하는가 하면 재래식 무기를 감축하고 인민 군대를 휴전선에서 멀리 물리라는 등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관측통들은 부시 행정부가 이미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대화 파트너가 아니라 사담 후세인 같이 무너뜨러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이미 그 붕괴 작업에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이처럼 북한 몰아 붙이기에 나선 것은 부시 말대로 김정일은 자기 안위를 위해 몰래 핵무기를 개발하고 주민 수백만쯤 굶겨 죽어도 까딱 않는 "믿을 수 없는 인물"인데다 최근 그의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후가 곳곳에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탈북자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 남아 있었으나 이제는 존경은커녕 증오에 가득 찬 쪽으로 바뀌고 있다. 탈북자의 정서는 일반 북한 주민의 정서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거기다 김정일 정권의 주민들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고 있다. 예전에는 국경 한번 넘는 것이 큰 모험이었으나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이번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중에는 북한을 여러 번 넘나든 사람이 여럿이다. 탈북자가 워낙 많은 데다 국경 경비원들도 부패하고 지쳐 단속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탈북했다 다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이 때에 대비해 100달러 짜리 지폐를 지니고 다니다 비닐 봉지와 함께 삼킨 후 북한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100달러 지폐 한 장이면 다시 탈북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 붕괴 작업의 첫 단계는 자금줄 봉쇄다. 수십 년 간 북한 정권의 젖줄 역할을 하던 일본 조총련의 빠찡코 자금 유입이 지금은 거의 차단된 상태다. 부시 이전부터 그랬지만 9·11 테러 이후에는 더더욱 이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고 있다. 일본의 고이즈미 내각은 역시 수십 년 동안 일본 근해를 무상 출입하던 북한 간첩선을 격침시킬 정도로 대북 강경 노선을 견지하며 부시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거기다 10억 달러 이상을 김정일 정권에게 안겨준 금강산 사업도 사실상 끝장났으며 북한의 주 외화 수입원이던 미사일 판매도 미국의 구매국가에 대한 불매 압력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연 50만 톤에 달하던 미국의 북한 식량 원조 또한 부시 행정부 출범 후 대폭 줄어든 상태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는 북한에 대한 모든 원조는 김정일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킬 뿐이란 부시 행정부의 대북관에 기초한다. 식량이든 돈이든 이것이 북한 주민을 살찌우는 데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의 군비 확장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작년 창립된 조국 안보국은 요즘

FBI와 함께 북한에 한 푼이라도 지원을 하는 단체는 이 잡듯 뒤지고 있다.
북한 목조르기의 두 번째 단계는 북한 인권에 대한 조명이다. 부시 행정부는 작년 10월 북한 인권 위원회(US Committee for the North Korean Human Rights)를 발족시켰다. 그 위원장은 레이건 행정부 때 국방차관을 지낸 프레드 이클레며 그 밑에 리처드 앨런 전 국가 안보 담당 보좌관,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 스티븐 솔라즈 전 연방하원의원, 로버트 번스타인 미 최대 인권 운동 단체 회장 등 거물급이 위원으로 들어가 있다.

이 단체의 설립 취지는
▲북한 지원 식량 분배의 검증
▲탈북자 처벌 금지 및 난민 자격 부여
▲경제 원조와 북한 내 인권 개선 연계
▲북한 주민에 대한 외부 정보 개방
▲인권 단체 및 외국 언론의 북한 출입 허용
▲북한의 투자 환경 개선 등 김정일이 들으면 펄펄 뛸 내용으로만 돼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위원회 설립 보도가 나가자 북한은 제일 먼저 성명을 발표, 북한을 망신시키기 위한 음모라면서 길길이 뛰고 있다.


실제로 인권위원 중 상당수는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한 후 명분으로는 인권을 물고늘어지고 실제로는 군비 경쟁을 가속화 해 소련을 파탄 나게 한 레이건 행정부 때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막강하던 소련도 무너졌는데 김정일 체제가 견딜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을 치료한 공로로 김정일한테 훈장까지 받았으나 북한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추방된 독일 의사 노베르트 폴러첸이 요즘 주목받는 것도 북한 인권위의 출범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25명 집단 망명을 성사시킨 폴러첸은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 워싱턴을 방문, 부시 행정부내 고위 관리들과 접촉을 가졌다. 이번 사건이 절반은 워싱턴의 묵인 하에 이뤄졌다고 보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폴러첸은 다음 달 다시 워싱턴에 와 연방 의회에서 북한의 인권 상황에 관해 증언할 예정이다.

수십 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내 탈북자 돕기는 이제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 한국과 일본,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에 지지자를 갖고 있는 조직으로 발전했다. 미국에서도 LA의 엑소더스 21(562-402-8111)을 비롯 전국 각지에 탈북자 돕기 조직이 있다. 최근 LA 타임스 보도도 있었지만 탈북자 지원자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베를린 모델’이다. 20만 명의 동독인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으로 빠져 나오면서 베를린 장벽과 동독이 무너졌듯이 탈북자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면 김정일 정권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부시의 김정일 목조르기는 이미 시작됐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올해는 제2, 제3의 탈북자 집단 행동 사건을 만들어 탈북자와 북한의 인권을 거론하고 내년에는 중국과 러시아에게 북한의 정권 변화에 개입하지 말라고 단도리를 한 후 경제적 압박을 강화한다면 빠르면 부시 집권 1기, 늦어도 2기안에 북한 체제 변화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과연 김정일이 소련과 동독을 무너뜨린 미국과 맞서 버텨낼 수 있을지 볼만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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