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동가치 인정하면 갈등 풀린다

2002-03-1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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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멘터리 21

▶ 박봉현 편집위원

힘의 논리는 노사 모두에 마이너스
라티노-한인 싸움으로 몰면 자충수
’주인의식’ 가득하도록 사기 앙양을


한인 대형마켓 중 하나인 아씨마켓의 노조결성 찬반투표가 말끔하게 처리되지 못했다. 찬성 66, 반대 67표로 ‘노조설립’이 일단 무산됐지만 시비가 걸린 15표에 대한 공방이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2~3년 동안 질질 끌게 돼 그 앙금이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노사 대립이 장기화할 경우 그 후유증도 심대할 것이다. 지루한 법정 싸움에 매달릴 것인가 아니면 탁 깨인 합의로 손 맞잡고 새 출발을 할 것인가에 이목이 쏠려 있다.


"노동자 8명씩 돌아가면서 노조설립 과정에 관한 교육을 받았는데 강사로 나온 전문변호사는 노조가 생기면 노동자와 회사 모두에게 불리하다는 논리를 폈다" "교육이 근무시간에 진행돼 하는 수 없이 참석했다" "업주측은 매니저들에게 직원단속을 교육했고 매니저들은 담당직원들을 상대로 노조 반대를 종용했다" 아씨마켓 노조결성 지지자들의 증언이다.


"투표 전 업주측은 일부 라티노 노동자들을 불러, 얼마 받기 원하느냐며 회유책을 쓰기도 하고 노조결성 투표 결과에 관계없이 절반을 해고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는 노동자들의 목격담은 막판의 긴박감을 생생히 전달한다. 업주측의 노조저지 운동은 투표 당일에도 멈추지 않았다. 매니저가 마켓 지하실에 설치된 투표장으로 향하는 직원에겐 "어디에 찍을 거냐"고, 투표장에서 나오는 직원에겐 "어디에 찍었냐"고 물은 것은 모종의 보복이 수반되지 않더라고 그 자체만으로 엄연한 비밀선거 정신을 훼손한 것이다.

업주측은 라티노 직원들이 퇴사하면 빈자리를 한인으로 대체했다. 투표 전에는 라티노 직원이 10명 정도 많았었는데 투표 당일에는 오히려 한인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서적으로 한인 직원을 구슬리기가 쉬울 것이란 판단에서 나온 전략이란 지적도 있다. 업주측은 한인단체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해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있다며 연방노동관계위원회에 조사를 요구했지만, 노동관계위원회가 외부세력의 배후조종 혐의에 대해 "근거 없다"는 판정을 내려 일단락됐으니 이를 다시 이슈화한다면 자충수를 두는 것이다.

투표 결과에 대한 친노조측의 입장은 의외로 담담했다. "승리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만일 투표에서 이겼더라도 표결 후 1주일 내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으니 업주측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다. 어차피 말끔한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았다"며 노동자들의 결집된 힘을 보여주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업주측도 선거 결과에 비교적 만족하는 눈치다.

수퍼바이저급 직원의 투표자격, 퇴직자의 투표자격, 기표오류, 명단에 없는 사람의 투표 등등의 문제를 야기한 15표에 대한 시비를 가려야 하지만 법정투쟁으로 수년을 끌 수 있으니 당분간 노조결성은 ‘겨울잠’에 들어가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양측의 불신과 갈등의 상처는 절개된 채 남아 있어 조속한 봉합이 요구되니 팔다리 쭉 뻗고 누울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노조에 찬성한 직원들도 폭넓게 수용하고 노동법을 준수할 것"이란 업주측의 표결 후 입장천명은 일단 긍정적 시그널로서 보여진다. 관건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후속조치 여부에 있다.

노사갈등의 씨앗은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를 놓고 양측이 공통분모를 찾지 못한 데서 움튼다. 노동자들은 "최저수준의 임금, 형편없는 베니핏, 인간적 모멸감, 부당한 해고를 견딜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업주측은 "미 대형마켓보다 시간당 임금이 적지만, 근무시간을 많이 주고 1.5배 오버타임 수당까지 지급한다"며 당당해 하지만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게 한다고 해서 시간당 저임금이 합당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약하다.

또 업주측은 "한인마켓들의 경쟁이 치열해 마진이 적은 것을 감안하면 노동자들의 요구는 지나친 것"이라며 볼멘소리를 낸다. 최근 극한 양상을 보이는 마켓들간 경쟁을 보면 이 같은 주장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엷어진 마진은 본질적으로 유통구조 개선 등 경영 개선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야지 노동자들의 임금을 잘라서 충당하려는 것은 ‘상도’가 아니다.

만에 하나 아씨마켓 노사분규를 라티노와 한인간 인종갈등으로 채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또는 앞으로 시도된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한인타운은 어차피 라티노 타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들의 수적 우세는 가시화됐고 머지 않아 LA 일원이 실질적인 ‘라티노의 땅’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우리가 누구보다 사이좋은 지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라티노다. 훗날 4·29 폭동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면 평소 반감이 한인 모두를 타겟으로 폭발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이 현재의 고객이며 미래의 고객이니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라티노 관리’는 필수다. 라티노 고객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관리 대상’인 것이다.

다른 대형마켓들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경쟁업체의 집안싸움을 불 구경하듯 팔짱끼고 고소해할 계제가 아니다. 아직은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지만 노동자가 많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는 직원들이 늘어나면 언제 내홍에 휘말릴지 예측불허다. 이번 분규를 타산지적으로 삼는 열린 눈이 필요하다. 지금이라도 직원들이 회사를 ‘진정한 내 직장’으로 여기도록 믿음을 심어주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중소규모 업주들도 "사람 대접 해달라"는 노동자들의 볼멘소리에 귀를 곧추세워야 할 것이다. 반말을 밥먹듯 하고 하인 부리듯 대했다면 반성할 일이다.

업주는 노조를 ‘불순분자’나 ‘암적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하고, 노동자는 업주를 ‘수전노’나 ‘착취자’로 보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야 뒤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다. 한솥밥 먹는 ‘내 식구’로 품는 자세를 지닌다면 노사갈등은 점화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의 마음에 주인의식이 가득하다면 업체의 장래에 대해선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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