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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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반대

2002-01-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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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포먼 칼럼

전통적으로 ‘충성된 반대’(loyal opposition)라는 개념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낯선 관념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이 중요한 아이디어를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양 문화 속에서 살면서 문제에 부딪치는 것을 보게된다.

’충성된 반대’라는 관례는 영국에서 몇 세기 전에 시작하였다. 신하들이 왕에게 충성하면서도 왕의 정부는 반대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완강히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정치적인 관습을 ‘충성된 반대’라고 한다. 이와 같은 관습이 미국 문화와 미국인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 친구들과 교제하면서 느낀 것인데, 자기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충성된 반대’라는 관념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 한인 기관, 한인 교회, 심지어는 나의 한인 가족에게까지도 ‘충성된 반대’가 용납되지 않아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라도 권력을 잡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일본 식민지 말기에, 이승만은 한국인들에게 애국정신을 본보여 준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와이에서 살면서 유럽인 아내와 결혼한 이승만 박사는 세상이 알아주는 세련된 사람이었다. 민주주의 문화에 익숙한 이 한국 사람이 그의 조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잘 이끌어 갈 것이라고 미국 사람들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기대에서 어긋나고 말았다. 한국의 분단과 전쟁을 이유로 독재정치를 하였다. 더 이상 독재정치 할 핑계거리가 없어진 1960년까지도 그는 나라가 마치 자기 개인소유인 것처럼 자기 뜻대로 다스렸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된 반대가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그의 군대는 그의 반대편에 서서 그를 쫓아내었다.

내가 아는 한인 기관이 있다. 그 기관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능력 있고 스마트하다. 비영리 단체이기에 미국 규정에 따라 이사들을 임명하지만 사실상 이사들이 하는 일은 이름을 빌려주는 정도에 그칠 뿐이고 모든 일이 한 사람에 의견으로 결정된다.

그 단체의 이사들은 고무도장을 찍어 주는 수동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커뮤니티 기관이 사적인 클럽이나 개인 회사처럼 운영됨에도 불구하고 이사나 직원 중에 아무도 그 지도자에게 반대를 제기 하지 못한다. 충성된 반대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인교회의 목회자는 아주 능력 있고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다. 새 신자들이 그의 강한 영적 지도력에 끌려 교회로 오지만 오래된 신자들은 그의 독단적인 목회 스타일에 유감을 가지고 교회를 떠난다. "나의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강한 목회 스타일로 교인을 다스린다. 목사 또는 다른 성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교회를 배척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충성된 반대가 용납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동서양의 이러한 의식구조의 차이가 우리 집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얼마 전에 아내와 나는 아메리칸 탈레반 존 워커에 대하여 토론한 적이 있다. 아내는 그가 잘못 인도를 받아 큰 실수를 저지른 젊은이라면서 그가 불쌍하다고 그를 동정하였다. 나는 아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의식적으로 결정한 일이기에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였다. 토론 중에 아내는 내가 그녀와 동의하지 않으면 눈에 띄게 섭섭해한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를 반대하기 때문에"라고까지 비약시킨다. 그녀에게 충성하지만 그녀의 의견에 반대할 뿐이라고 상기시켜 준다.

"내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의 그 자유를 옹호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걸겠다"라고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가 말했다. 우리들도 모두 함께 이와 같은 마음으로 새해에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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