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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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유감, ‘야만의 나라’

2002-01-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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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서울에선

▶ 안영모<언론인>

2002년 임오(壬午) 신년의 벽두부터 어두운 이야기를 해야 하는 필자의 심사도 좋지는 않다. 하지만 나라 안팎이 태평치 않은 판에 덕담이나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나라 어느 구석을 둘러보아도 심사가 뒤틀리는 일들만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다. 권력 쟁취의 살벌한 서곡이 울려 퍼진 정치권, 주름살 펴질 기미가 없는 국민들의 주머니 사정, 나라 구석구석이 부정부패로 썩어가고 있는 병리현상, 큰 도둑(권력형)에 작은 도둑(서민형)마저 기승인 무법천지--얼룩진 한국의 자화상이다. 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감히 ‘아노미’(Anomie) 현상으로 분석한다. 법(Law)도 규범(Norm)도 상식(Common Sense)도 없는 몰가치(沒價値)의 사회가 됐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이 나라의 법치는 무너졌다. 위에서부터 저 말단의 민초들까지 "법을 지키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법을 어겨도 ‘빽’만 든든하면 면죄부를 받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정권의 핵심과 국가 권력의 실세들이 온갖 이권과 ‘뭉칫돈’에 눈이 멀어 청탁불문하고 부정을 저질러왔다는 사실이, 양파 껍질 벗듯 드러내고, 그런 자들이 하나 같이 법망을 빠져나간다는 사실에서 나의 주장은 증명된다. 그들에게 국가관-공직의식-청렴-준법 등의 낱말은 한낱 사어(死語)에 불과하다. 정권을 잡고 이권이 거래되는 요직에 버티고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부를 금고에 쌓느냐, 그리고 법망을 벗어나느냐는 일구월심만이 그들 뇌리에 차있다.

법치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부패 공직자의 그 더러운 처신에만 있지는 않다. 빙산의 일각처럼 어쩌다 재수가 없어 그 죄악상이 들통이 나도 오랏줄을 받는 자들은 극소수, 대개가 ‘정치와 권력’의 방패 뒤로 숨고 만다. 법 집행을 책임진 사정당국이 권력형비리 사건 앞에만 서면 작아지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그럴밖에 없다. 대통령의 친인척, 청와대 수석비서관, 검찰의 검사장급 고위직, 국정원 2인자, 경찰간부 등 권력의 중심부가 줄줄이 부패 스캔들의 혐의를 받고있으니 누가 누굴 감시하고 처벌한단 말인가. ‘한통속 봐주기’로 법치는 처절하게 붕괴됐다.


규범과 상식은 어떤가. 법이 무너진 사회에서 도덕률이 통할 리 없다. 부정부패라는 범죄행위가 만연된 가운데 도리, 수치심, 책임의식, 봉사정신, 질서 등 인간성과 심성도 매 말랐다. 나는 그 원인을 ‘수치심의 실종’에서 찾는다. 수치심--이는 인간만이 갖는 고유 심성이다. 그런고로 예로부터 공자나 많은 도덕군자들이 이 수치심을 인간 됨됨이의 제일 덕목으로 손꼽았던 것이다. 한데 요즘 한국에서 이 수치심은 사라졌다. 위로는 권력을 잡은 자들로부터 아래로는 20대의 노란 머리 젊은 군상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언행에 대해 도시 부끄럽다는 생각이 없다. 부정한 돈을 먹어도 "나는 단 한 푼 그런 돈을 받지 않았다"고 시치미를 떼고, 마약에 난잡한 섹스 파티로 물의를 일으켜도 천연덕스럽게 TV에 얼굴을 내민다.

수치심의 실종은 결국 책임회피 면피라는 낯두꺼운 군상들을 양산했다. 보라. 160조라는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이 새나가도 "내 책임이요"하고 나서는 자가 없다. 그 지고한 청와대 집무실에서 1억원의 검은 돈을 꿀꺽했다는 신모라는 전직 수석비서관은 또 무어라 했는가. "나는 돈 줬다는 그 사람을 본 적도 없으며, 돈을 받았다면 할복이라도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같은 밥솥을 먹은 검찰이 천몇백만원이라는 그야말로 높은 사람들에겐 "코끼리 비스킷" 같은 부스러기 돈을 받았다며 구속은 했지만, 막상 장본인은 그런 일없다고 잡아떼고 있다. 법정에서 혐의가 확정되면 할복이라도 하지 않을까 지레 걱정들은 마시라. 그는 아마도 영원히 돈 받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터임으로. 하기야 그 뿐이겠는가. 정권 실세인 김모 의원, 민주당의 김모 여성의원도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죄를 자인하는 단 한사람이 없다는 사실, 이게 바로 이 나라가 수치심이 사라진 ‘야만의 나라’임을 말해준다.

이웃 일본은 다르다. 연전 경제위기로 부도가 나자 한 일본 회사의 중역들은 TV에 나와 허리를 굽히며 "스미마생"(죄송합니다)을 연발했다. 중역 한 사람은 끝내 책임을 통감, 자결했다. 일본 정치인들도 우리처럼 뻔뻔하지는 않다. 수뢰혐의를 받은 한 중의원의원(한국계)도 자결로써 죄 값을 치렀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 문필가인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란 책에서 "수치의 문화가 일본인의 참회와 반성의 외연을 넓혔다"고 분석했다. 정곡을 찌른 분석이다.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이 됐는지 새해에도 가슴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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