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쓴 약은 삼킬 수밖에

2001-01-04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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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

환난이 닥치기 전 5년(1992∼1997)동안 한국 경제는 연평균 7%에 가까운 높은 성장을 기록하며 피상적으로는 과거 30년 넘게 지속돼 온 확장 추세에 전혀 차질이 없는 듯이 보였다. 흠잡을 데 없는 경제 펀더멘탈 같았다. 1인당 소득 1만달러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게됐고 이대로 라면 2만달러 고지까지 걸리는 시간도 크게 단축될 것처럼 느껴졌다.

위정자가 장구 치고, 재벌들은 북 치고, 관리들이 꽹과리 치고 국민들은 그에 맞춰 가무음주로 화답하며 거칠 것이 없는 판에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요소들이 크게 파손돼 기본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쓴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 뒤 소위‘IMF 시대’의 도래는 근본적으로 잘못돼 가고 있던 한국 경제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으나 그 신호의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심각하게 대처하려던 정책 당국자는, 지금 생각해보면 소수의견 그룹으로 따돌림당한 나머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만 것처럼 보인다.


특히 1998년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 6.7%로 불황을 기록한 뒤 IMF 2년째인 1999년 10.7%라는 높은 성장을 달성하자‘IMF 조기졸업’은 국민들에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관료들은 정책의 성공을 자축하기 바빴다.‘한국의 경제 관료들은 천재’라는 말이 과찬이 아닌 듯 싶었고‘한국 국민의 우수성을 만방에 입증한 위대한 찰나’라는 공치사가 조금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듯 싶었다.

그 당시, 한국 경제가 근본적으로 궤도수정을 한 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짧으면 5년, 길게는 10년 이상도 걸릴 수 있다고 전망했던 필자는‘한국 경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비관론자’라는 낙인이 찍혀도 할 말 없을 듯 보였다.

그처럼 짧은 기간에 큰 혼란없이 고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왕도를 놔두고 구태여 국민 전체가 엄청난 고통을 참아야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고 덤비는 듯 싶었다. 마치 필자는 문화혁명 당시 서슬이 퍼렇던 홍위대 앞에서 떨어야 했던 한 지식인의 초라한 심정을 경험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의 한국 경제에서 3년 전 상황보다도 훨씬 더 심각해질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2차 구조조정 정도로는 문제가 쉽사리 풀릴 것 같지 않고 밑 빠진 독에 국민 세금 퍼다 붓는 식의 무모한 공적자금 투입으로는 성공하기가 쉽지 않을 것만 같다.

너무 오래 동안 체제적 비능률 구조 속에 살아오면서 붙은 타성이 정상이라고 믿는 기업가, 소비자, 그리고 정부의 사고방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선별적 법 적용은 불신사회를 만들어내고 사회불안을 확대시킨다. 권리만 존재하고 책임은 실종된 공공부문 조직 구조가 변화하지 않으면 시장 기능을 제대로 보완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국 경제 문제들은 경제 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훨씬 지났기 때문에 법 정책 및 사회정책과 교육정책을 포함하는 복합정책 접근법이 필요할 때라고 믿는다. 리더십이 진정 아쉽다.

한국경제가 성실하게 구조 조정작업을 실시하는지 아닌지를 재는 방법은 간단하다. 만약 단기간에 고성장을 다시 이룩했다고 하면 구조조정 포기 내지는 불성실로 짐작해도 되지만 그 반대로 어느 기간동안의 고통은 미래의 성공을 위한 담보로 볼 수도 있다.
쓴 약을 삼킬 도리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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